예로부터 동양학(東洋學)이라 이름할 수 있는 모든 술학(術學)을 통틀어 의연히 제왕학(帝王學)으로 군림한 기문둔갑은, 일반인들의 접근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학문의 심오하고 난해함으로 인하여 오해의 소지가 상당하였다. 그로 인하여 무협지에 나올 법한 호풍환우(呼風喚雨)하고 신출귀몰(神出鬼沒)한 신비스러운 술수(術數)쯤으로 인식되어왔다. 그로 인해 동양삼국, 즉 한국, 중국, 일본에 있어서도 기문둔갑(奇門遁甲)에 정통한 이가 고금(古今)이래 드문 이유의 하나이며, 또한 위서(僞書)이든 진서(眞書)이든 기문(奇門)에 관한 서적을 수중에 얻더라도 오묘한 이치를 깨닫기에는 학문의 특성상 많은 장애가 도사리고 있었기에, 학문의 발전은 차지하고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검정(檢定)작업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오늘날 역학(易學)내지 역술(易術)이라 불리는 수많은 술학들이 인사(人事)문제에 치중하여 인간 운명의 길흉(吉凶)판단을 주관적이고 작위적으로 해석하여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작태가 독버섯처럼 번져나가면서 세상의 건전함을 해치기에, 동양학에 있어서 가장 합리(合理)적이고 근원(根原)적이며 과학성(科學性)을 갖춘 학문의 본성을 상실하고 아류로 남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서구학문의 과학성이란 다분히 직선적이며 파괴적, 반자연적(反自然的)인 양태를 취하여 발전하여 왔기에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으며,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면서 제 3의 학문을 통한 지구상의 질서재편성이 요구된다.동양학의 특성은 자연(自然)과 인간(人間)의 조화로움을 추구함이 시작이며 끝이다.
천(天) 지(地) 인(人) 삼재(三才)가 하나의 유기체(有機體)로서 존재하면서 끊임없이 대립적이면서도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강조하기에 생동감이 넘쳐 나면서도 그 한계를 규정할 수 없음이다. 이에 인류사에 있어서 문명의 전환점에 이르른 이 시점에, 누천년(累千年)을 내려오면서 선인(先人)들의 지혜로움의 보고라 할 수 있는 동양술수학(東洋術數學)을 통하여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공존하며 나아가는 시대를 열어갈 수 있는 방식을 궁구하고자 하는 것이다.기문둔갑(奇門遁甲)은, 고대로부터 역술이라 칭할 모든 학문[여기에는 주역(周易)과 음양오행학(陰陽五行學)의 결합으로 발생한 숱한 술학들을 일컬음]이 구궁(九宮)을 배경으로 논리적이면서도 체계적으로 자연스럽게 녹여져 있어서 가장 합리적이며 보편타당(普遍妥當)한 과학성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음이다. 이에 본 학문의 특성상 기존의 학설들을 새로이 정립하고, 동시에 한 단계 발전시킬 수 있는 학문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본 학문은 특히 홍국수리오행(洪局數理五行)에 근거하여 이 땅에서 발전한 홍국기문(洪局奇門)이 보태어져 한층 더 심오한 이론체계를 이루고 있으며 또한 우주순환원리(宇宙循環原理)를 음양수리오행(陰陽數理五行)에 기초하여 일맥상통(一脈相通)하게 전개시켜 나가면서도 그 처음과 끝이 한결 같으면서 여타 다른 제 학설들을 포괄하는 유연성과, 자가변화발전하는 유기체(有機體)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더욱이 예로부터 그 추구하는 바가 상통천문(上通天文), 하달지리(下達地理), 인사명리(人事命理)로 전 우주(全宇宙)의 시공간(時空間)개념을 한 이치(理致)로 꿰뚫어 보고자 하는 것이니, 학문의 무한한 변화와 수용정도를 가히 알 수가 있음이다.[둔갑기문의 역사]『한단고기』에 의하면 일찍이 신시시대(神市時代)에 우사(雨師)인 복희(伏羲)가 한역(桓易)을 만들고, 선인(仙人) 발귀리(發貴理)의 후손인 자부선생(紫府先生)이 신명득도(神明得道)하여 오행의 수리(數理)로 《칠정운천도(七政運天圖)》를 저작하여 칠성력(七星曆)을 시작하니 이로부터 둔갑기문이 시발한다.『포박자』에 의하면 황제헌원(黃帝軒轅)이 동쪽으로 청구(靑邱)에 이르러 풍산(風山)을 지나 자부선생을 뵙고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아 이를 가지고 온갖 만가지 신(神)을 불러 부렸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둔갑기문의 시작은 상고의 신시시대임이 자명하다.『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에 의하면 헌원황제(軒轅黃帝)가 탁록(탁鹿)에서 치우천왕(蚩尤天王)과의 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 우연히 꿈에 천신(天神)에게서 부결(符訣)을 받았고, 이를 풍후(風后)가 명을 받아 문자로 완성한 것이 둔갑기문의 시작이라고 되어있다. 이에 풍후는 병법(兵法) 13편과 고허법(孤虛法) 12권을 지었고 둔갑(遁甲) 1천80국(局)을 처음으로 정립하게 된다.주(周)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태공(太公)이 『음부경』의 주를 지어 《자부삼황(紫府三皇)》의 뜻을 조술(祖述)하였으며, 병법(兵法)을 알아 기문(奇門)을 선포하여 72활국(活局)으로 세우고 군사(軍師)가 되어 주무왕(周武王)이 상(商)을 칠 수 있도록 도왔다.진(秦)이 망하고 한(漢)이 일어날 시기에 장량(張良)이 황석공(黃石公)으로부터 삼략(三略)을 전수받아 기문(奇門)을 동지(冬至) 12절(節)을 양(陽) 9국(局)으로 하고 하지(夏至) 12절을 음(陰) 9국(局)으로 하여 1년을 18국(局)으로 정립하여 한(漢) 고조(高祖) 유방을 도와 천하통일을 이루어 한나라 개국공신이 된다. 삼국시대에 와서는 제갈공명(諸葛孔明)이 더욱 발전시켜 병법(兵法)에 이용하여 큰 성과를 거둔 것으로 유명하다.
서기 602년에 고구려의 승려인 관륵(觀勒)이 백제를 거쳐서 왜로 건너갔는데, 역서(曆書)와 천문지리서를 비롯하여 둔갑방술(遁甲方術)에 관한 서적을 전하여 일본의 아스카 문명을 피우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에 천문과 역법을 바탕으로 기문둔갑이 정치와 사회문화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당(唐) 태종 때 이정(李靖)이 기문둔갑을 병법과 정치에 활용하여 당나라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면서 기문둔갑은 정치적 목적에 의하여 금서(禁書)로 정해지고, 이 시대 이후로 궁중 깊숙이 감추어 두고 제왕들만 활용하게 된다. 만약 일반인이 둔갑기문의 이치를 알고자 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가 없게 되면서부터 소수에 의하여 은밀히 전해져 오게 되어 그 문헌 및 이치가 거의 실전이 되어 버린다.후대에 주원장을 도와서 명(明)을 건국하는데 큰공을 세운 유백온(劉伯溫)이 둔갑기문에 정통했으며 특히 유기(劉基)는 연파조수가(煙波釣歌)를 구해(句解)하여 둔갑기문의 주요문헌이 되고 있다.위에서 보듯이 기문둔갑의 심오한 이치는 정치와 전쟁에 활용되어 상당한 효력을 발휘하면서 한 국가의 흥망성쇠(興亡盛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을 알 수가 있다.
기문둔갑은 여타 어떤 술수(術數)에도 비견될 수 없을 정도로 이치의 타당성과 빼어남이 있고 기존의 모든 술수를 기문둔갑의 영역에 둘 수가 있기에 예로부터 제왕지학(帝王之學)이라고 말함에 주저하지 않았다. 또한 오늘날에는 기문이 인사명리(人事命理)에 적용되면서 그 이론의 합리성과 오묘함이 한층 더 입증되고 있다.[기문둔갑 개요]역사를 살펴보면 난세시 건국에 큰 공헌을 한 술사들이 한결같이 삼식(태을, 기문, 육임)의 병법을 활용한 흔적이 명확히 문헌에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그 당시 이후로는 실전(失傳)되어 버리는 것인지 의혹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일찍이 헌원황제(軒轅黃帝)와 치우천왕(蚩尤天王)의 탁록전에서부터 기문둔갑이 주요한 병법으로 활용되기 시작하면서 이후로 강태공(姜太公), 제갈공명(諸葛孔明), 장량(張良), 이정(李靖), 유백온(劉伯溫) 등이 삼식(三式)에 능통하여 국기(國基)를 견고히 하는 데 이바지 한 것을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가 있지만 정작 문헌상으로는 학술이 제대로 보존되지 못했다.[고금도서집성]이나 [사고전서]류를 보더라도 천문역법과 육임에 관한 이론은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고 또한 배우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상하리 만치 기문에 대한 이론은 두 학술의 경우에 비추어 왜소하기 짝이 없을 정도이다.그러면 과연 기문둔갑의 특성이 병법에 국한되어 난세에만 필요한 한시적인 쓰임이라 그러한 것인가? 일설에는 제왕들이 천하를 평정하고 난 이후 기문을 익힌 술사들이 가장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어 최우선적으로 제거되었다고 한다. 또한 실전에 사용된 이론이나 문헌을 모두 소각하였고 기문에 관한 서적을 깊숙이 감춰 두고 제왕들만이 열람할 수 있도록 하였기에 제왕학(帝王學)이라 칭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어쩌다 시중에 유출된 서적이 간혹 있더라도 주요 이치를 고의로 누락시킨 상태의 책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살펴보더라도 기문둔갑이 그 만큼 무서운 술수라는 반증이기도 한 것이다.
삼식을 천지인(天地人)으로 구분하여 논하자면, 태을(太乙)은 천문관측을 통하여 정립된 이론을 적용하는 것이요, 기문(奇門)은 지리상에 그 이치를 펼치고, 육임(六壬)은 주로 인사(人事)를 다룬다는 개념이다. 그러나 이 삼식이 각기 달리 쓰였다기 보다는 한 가지 상황 즉 전쟁에서 출병(出兵)여부를 판단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느 시점에 동(動)할 것인가 정(靜)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또 장수(將帥)를 기용하는 일과 병사를 움직이는 일에 이르기까지 시시각각 변화와 길흉(吉凶)을 판별하고 주객동정(主客動靜)을 따져 신중하게 실행하게 되는 것이다.이러한 특별하고 긴급한 상황 속에서 주로 사용되었기에 고서(古書)에 이르길, '연월일시(年月日時)의 고허법(孤虛法)을 사용시 최고효험은 시고허(時孤虛)에 있는 것인데, 만일 시고(時孤)를 사용하면 비록 한 여인의 몸일지라도 열 명의 적을 능히 이긴다'고 하였던 모양이다.이와 같이 동시에 활용되어야 할 삼식 중에서 기문둔갑은 그 전형을 파악하기 어려우면서도 삼식(三式)의 대명사로 기문이 주로 언급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기문학을 하고자 하면 천문의 대략은 알아야 가능한 것이요 결국 이치(理致)를 인사에 적용하게 되는 것이니 종내 삼식을 능히 다루어야 만이 이른바 기문을 한다 할 수 있겠기에 그렇다고 보여진다.그러나 기문둔갑이 학리(學理)적인 면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소위 장신법(藏身法)이라 하여 일종의 술법(術法) 내지 도술(道術)이 있으니 기문의 양면(兩面)이요 완성의 경지인 것이다[기문둔갑 총론]옛날 크게 혼란하였을 적에는 갑자(甲子)를 지어 천지(天地)의 수(數)를 주관하였다. 이에 풍후(風后)는 다시 둔갑(遁甲)으로 펼치게 되었으니 그 법(法)은 그윽하고 깊으며 비밀스러워서 헤아려 엿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므로 육갑의(六甲儀)로써 직부(直符)가 되고 이십사기(二十四氣)로써 식국(式局)이 되어 육무지하(六戊之下)에 귀신(貴神)이 머무를 바가 있으며 건 곤 감 이 진 손 간 태(乾 坤 坎 離 震 巽 艮 兌)의 팔괘(八卦)로써 통괄한다.일절이기(一節二氣)로 나뉘어짐으로써 팔절(八節)은 각기 주괘(主卦)에서 일어나니, 동지(冬至)후 양둔순수(陽遁順數)가 되어 일(一)로부터 구(九)에 이르고 하지(夏至)후 음둔역수(陰遁逆數)가 되어 구(九)로부터 일(一)에 이르러 동지(冬至)후 육의(六儀)는 순포(順布)하고 삼기(三奇)는 역포(逆布)하며, 하지(夏至)후 삼기(三奇)는 순포(順布)하고 육의(六儀)는 역포(逆布)하니 육의(六儀)는 즉 육갑(六甲)이라고 말하고 삼기(三奇)는 을(乙) 병(丙) 정(丁)이다.
육갑(六甲)이 직부직사(直符直事)가 되는 것처럼 을(乙)은 일기(日奇)가 되고 병(丙)은 월기(月奇)가 되고 정(丁)은 성기(星奇)가 되며 무(戊) 기(己) 경(庚) 신(辛) 임(壬) 계(癸)는 의(儀)가 된다. 항상 직사(直事)로써 시궁(時宮)에 가(加)하면 개(開) 휴(休) 생(生) 삼문(三門)이 임(臨)하는 곳을 안다. 또한 직부(直符)로써 시(時)에 가(加)하면 천상(天上)에 삼기(三奇)는 개(開) 휴(休) 생(生) 삼문(三門)과 합(合)이 되어 길(吉)하고 불리(不利)함이 없다.구궁(九宮)은 즉 구성(九星)이다. 대개 천(天)에는 구성(九星)이 있고, 구궁(九宮)을 진(鎭)함으로써 지(地)에는 구주(九州)가 있고, 구토(九土)에 응(應)함으로써 모든 낙구(洛龜)를 취하니 戴(머리)九, 履(발)一, 左(좌)三, 右(우)七, 二 四肩(어깨), 六 八足(다리)이 되고 오(五)는 중궁(中宮)의 의(儀)에 거(居)한다. 이 둔갑법(遁甲法)은 지나침이 없어서 천(天)의 일시(日時)를 타고 지(地)의 방향(方向)을 택(擇)하여 사람을 부리면 모든 추길피흉(趨吉避凶)을 안다고 이른다. 어찌 行軍避敵伏匿逃形(군사의 움직임과 적을 피하고 은둔하고 도주하는 형세등)의 괴술(怪術)에 귀 기울이지 않겠는가.
문의 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