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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차례 상에 오르는 제물에 숨겨진 역사

염결 2006. 11. 27. 18:20
 

차례 상에 오르는 제물에 숨겨진 역사



노중평





금년 추석 차례 상에 작년에 이어 또 피자가 올랐다. 조카가 피자가게를 시작하고 나서 생겨난 풍속의 변화이다. 조카가 피자가게를 지속하는 한 이 일은 계속될 것이다. 아마 다음 대에도 피자는 차례 상에 오르게 될 것이다.


오늘날 차례 상에 오르게 된 제물로 확정이 된 메· 탕· 술· 떡· 나물· 과일· 한과· 어포· 적은 내 조카가 차례 상에 피자를 올려 제물로 확정이 되듯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 제사상에 오르게 되어 제물로 확정이 된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 시대의 패러다임이 반영되어 있다.


무엇이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제물이 차례 상이나 제사상에 오르게 된 경위를 추론해 보는 것이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제일 먼저 무엇이 제물로 제상에 올랐을까?


제물을 올릴 제상을 만들면서 진설陳設이 본격화되었을 것으로 보는데, 그 이전에는 거적居嫡(제관인 장남이 제물을 진설하는 자리와 절하는 자리라는 뜻)을 깔고 제물을 올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무당이 1년에 한 번 자기가 모시는 성주(星主로 볼 때는 해· 달· 북두칠성 천부삼인, 聖主로 볼 때는 무당이 모시는 몸주)에게 제사를 올리는데, 이를 진적(필자는 진작進爵의 변음으로 보지 않고 眞嫡으로 본다)이라고 함으로 거적에서 온 말로 본다. 제물로 구운 고기를 올릴 때는 진적進炙이라고 썼을 것이고, 맏아들이 무무巫舞의 도움을 받으며 제사를 올렸을 때는 진적進嫡이라고 했을 것이다.


거적을 사용하기 전에도 제물은 있었을 것이므로, 태초에는 제물로 무엇을 올렸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구석기시대의 사람인 홍수아이 주변에서 발견된 곰의 뼈들이 곰의 형상을 갖추고 있었던 점으로 보아서, 수렵시대의 제물은 곰이나 물고기나 조개류를 썼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제물을 올렸을 것이므로 무엇을 제물로 올렸을 것인가 하는 의문은 남는다.


거적을 절하는 자리(蓐位-거적)로 물리고, 그 자리에 제상이 놓이게 된 때는 나무로 상을 만들 수 있을 만큼 도구 사용에 익숙해졌을 때였을 것이다.


여자들이 우물가에 정화수 한 그릇 떠놓고 빌어 온 유습으로 보아서, 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겠다. 물을 제사에 쓸 때는 현주玄酒라고 하였다. 술을 뜻하는 주酒자를 쓰기 시작하면서 북극수北極水를 현주로 호칭하였을 것이다.


玄은 북극이다. <부도지>에 마고가 마고성을 폐쇄할 때 우리의 조상인 황궁黃穹이 무리를 이끌고 북쪽에 있는 천산주天山洲를 찾아 정착하였다. 천산주란 북쪽바다에 떠있는 섬으로 천산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마고는 마고성을 폐쇄할 때 두 딸 궁희와 소희를 데리고 천수天水로 성을 청소하였다. 천수로 마고성을 정화淨化시킨 행위가 후대에 성수로 인간의 몸과 주변을 깨끗이 하는 정화행위로 전수된다. 이 물이 정화수井華水+ 淨化水=淨華水이다. 井華水의 정은 북극성에 있는 우물이고, 화는 북극성이다. 그러므로 정화수는 북극수를 뜻한다.


북극수에 수정水精이 있다. 수정은 마고성을 천수로 정화시킨 마고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마고가 황궁· 유인· 한인· 한웅· 단군왕검으로 전수한 전부삼인은 수정의 징표가 된다. 그래서 한웅천왕으로부터 천부삼인을 인수한 단군왕검을 수정이라고 하였고, 그의 아들 부루를 수정자水精子라고 하였다.


부루가 단군왕검으로부터 제위인 왕검의 위를 물려받으면서 그를 용왕龍王이라고 호칭하였다. 용은 수정의 결실인데, 그가 왕검이 되었으므로 용왕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용신각이나 용왕전에 모시는 용왕은 부루단군의 신상이다.


다음에 오곡이 제상에 올라간다. 쌀농사의 역사가 15000년 오곡의 역사가 5000년이므로 오곡이 제상에 올라가게 된 역사는 적어도 5000년이 넘는다.

충북 청원군 소로리에서 1994년에 출토되어 ‘소로리볍씨’로 알려진 볍씨를  제례 역사상 최초로 생미生米로 제상에 올렸을 것으로 볼 수 있다.


2003년 1월 충북 옥천 대천리 유적인 신석기시대 집자리에서 탄화된 쌀과 보리·밀·조·기장 등 ‘오곡’이 발굴되었다.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결과 오곡이 생산된 때가 BC 3500~BC 3000년으로 밝혀졌다. 벼와 조, 기장은 봄·가을 작물이고 보리·밀은 늦가을~초봄 작물이므로 신석기인들이 1년 내내 농사를 지었음을 보여준다. 김포 가현리와 일산 가와지 유적 토탄층에서도 BC 3000~BC 2000년 전에 벼농사를 지었음이 밝혀졌다.


천제를 지낼 때는 오곡을 모두 생미로 올리는데, 오곡의 생산이  메와 떡과 술의 발명으로 이어졌고, 이들 3가지가 조상제사 때 제상에 올려졌다.


메는 묘에서 제물로 올림으로 메라는 이름이 생긴 듯하고, 떡은 나라의 덕을 의미하는 뜻에서 떡으로 이름이 정해졌을 것으로 본다. 최초의 술은 막걸 리가 되었을 것이다. 막걸리는 마고에게 올리는 동이족의 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막걸리를 걸러 약주를 뽑아냄으로써 약한 술의 의미로 약주로 불리게 되었을 것으로 본다.


적炙은 사냥하여 잡은 고기로 만든 육적肉炙과 어로로 잡은 물고기로 만든 어적魚炙의 둘로 나눈다. 사슴· 닭· 소· 돼지를 육적에 썼고, 북어· 조기· 문어 등을 어적으로 썼다. 이는 수렵시대의 유습으로 보인다.


이어서 과일도 제상에 오르기 시작하는데, 감은 벼슬하는 무당인 대감大監의 의미로 쓰였다. 감을 시柿(枾· 柹의 약자)라고 했는데, 시尸(칠성신, 임금)· 신神(일· 월· 성신 삼신)과 관련이 있는 문자로 본다.


사과에는 사과巳果(뱀을 인종의 아이콘으로 쓰는 풍이風夷의 자손)의 의미가 있다. 배에는 주舟의 의미가 있다. 주의 음차로 본다. 밤에는 밤(夜)의 의미가 있고, 대추를 대주旲晝의 음차로 보면 대낮이 된다. 따라서 밤과 대추가 밤과 낮을 상징한다고 본다.   


한과는 산자와 약과와 약식과 다식을 제상에 올린다. 이 풍습은 먹을거리가 화려해진 고려시대의 풍습이다. 제상에 올리는 나물 종류는 인체의 뼈와 살과 체모 등을 뜻한다.


우리가 제사를 지낸 역사가 1만년이 넘으므로 제물의 가지 수도 많이 늘어나 종묘제례 때는 엄청나게 많은 제물이 제상에 올랐다.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임금이 지내는 제사에서 제상에 올리는 술만 해도 청주· 약주· 막걸리· 현주· 감주 등등 6가지나 되었다. 기이하게도 소주를 쓰지 않았다. 아마 만족의 술이라고 쓰지 않았던 듯하다. 


제사를 처음 시작한 사람은 제정일치시대의 임금이었던 무당이었다. 구한말에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무당내력>에는 시루 1개에 떡과 잔을 올리는 것으로 검소하고 단출하게 하였다. 다만 국가기관인 화방에서 만들어 주는 꽃인 수팔련을 제물과 함께 올렸다.


그러나 오늘날 굿을 할 때와 차례를 지낼 때 올리는 제물은 가지 수가 많고 분량도 많다. 그러므로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옛 모습을 찾는다면 물과 막걸리와 떡과 메와 소찬으로 족할 것이다. 


출처 : 마고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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