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연개소문> 비평에서 보여주는 상고사에 대한 터무니없는 비난
노중평
어느 분이 쓴 SBS에서 방영중인 <연개소문>의 비평문을 읽고, 비평문이 역사물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 걱정이 되는 부분이 있어서 이 글을 쓰기로 하였다.
요즈음 역사자료가 부족한 우리의 현실에서, 방송사가 우리 상고사를 작품화하는 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이 일을 시작으로 꾸준하게 많은 작품이 생산되기를 기대한다.
이 글을 시작하기 전에 역사물 창작에 대해서 필자의 소견을 먼저 밝히기로 한다. 역사창작물엔 3가지 카테고리가 정해질 수 있다.
첫째 카테고리는 역사자료를 바탕으로 충실하게 제작되는 정통역사극분야이다. 작품에서 역사의 상한선을 끌어 올릴수록 자료부족이라는 장벽에 부딪치게 됨으로 접근이 용이하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탁월한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둘째 카테고리는 오락사극분야이다. 이 사극에서는 굳이 역사자료에 충실하지 않아도 되는 분야이다. 따라서 황당무계하다는 평을 들을 수 있다. 정사正史 자체에도 기록자의 창작성이 작용하는 만큼 정사에서 일탈했다는 비난을 가할 수 없는 분야이다.
셋째 카테고리는 첫째 요소와 둘째 요소가 혼합된 경우이다. 역사기록에는 추론의 역사라는 장르가 있는 만큼 누구나 감쪽같이 속일 수 있는 스토리를 창작할 필요가 있다. 창작된 스토리가 후에 사실史實로 추론이 가능하게 된다면 역사물 창작의 보람을 만끽할 수 있는 분야이다. 단 한 줄의 기록, 단 한 개의 고고학적 유물에서 탁월한 스토리가 창작될 수 있다. 이 창작물에서 사라진 한 시대의 역사 추론이 가능해진다.
단 한 줄의 역사기록만 가지고 역사극을 만들어야 하는 작가의 입장에서 보면, 추론의 역사학은 역사가들의 몫이 아니라 작가의 몫이다. 정사로 인정하자는 동의만 받을 수 있다면, 굳이 황당무계하고 근거가 없는 엉터리라고 매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드라마 <주몽>에서 ‘고산국의 소금산 스토리’는 우리에게 역사추론의 단서를 제공해 준다. 그러므로 이 작품이 역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황당무계한 스토리로 짜여 있다고 해도 ‘고산국의 소금산 스토리’ 하나로 드라마 성공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요즈음 인기를 얻고 있는 드라마 <주몽>이 정통사극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미 이 작품은 인물설정에서부터 상당한 부분이 정사에서 벗어나 있다. 예컨대 연상의 여인 소서노의 나이를 끌어내려 총각 주몽에게 맞추고 있는 점, 역사번역서나 드라마에서 우태로 발음되고 있는 우이가 소서노의 남편이고, 소서노와 우이 사이에 이미 아들 비류와 온조가 있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를 왜곡한 다빈치코드처럼 정형화 되어 있는 스토리를 뒤집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려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역사창작물은 어차피 없는 자료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니까 전편이 허구로 채워질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연개소문>이 <삼국지>나 무협지를 표절하거나 이들 작품의 아류로 전락해서는 아니 된다고 본다. 이 작품에는 치우천왕과 단군왕검이 신앙의 대상으로 등장하는데 그분들이 가지고 있었던 땅을 수복하고 당시의 정신을 되살려내는 작업을 연개소문이나 주몽이라는 인물을 통하여 정당화 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고 어물정하고 넘어가서는 아니 될 일이다.
나는 <연개소문>과 <주몽>이 우리나라 역사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제작된다는 점에서 환영한다. 역사가들이 제대로 손을 대지 못한 전입미답의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는 점에서 환영하는 것이다. 앞으로 TV가 이 시대에 필요로 하는 새로운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고 본다.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정사와의 괴리라든지, 자료가 없어서 추론으로 복원한 역사를 토대로 하여 작품이 만들어져 나가고 있다는 점을 자막처리를 하여 밝혀 주어야 한다. 역사왜곡이라는 오해를 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치우천왕과 단군왕검과 고구려의 관계
‘연개소문’은 1·2회 분에서, 전쟁에 들어가기 전에, 치우천왕과 단군왕검에게 치성을 드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런 장면에 대하여 심한 불쾌감을 나타내는 전문가 영역에 속한 사람들이 있다. 고구려연구재단의 모 연구원이 “치우천왕, 배달국, 환인 등은 후대의 기록에 나오는데, 고구려시대의 인물인 연개소문이 이를 알았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지적하였다. 고구려사 전공자가 고구려사 이전의 역사를 왈가왈부하는 현실이 잘못되어 있다. 아무리 역사가라고 하더라도 비전공자는 전문가가 아니다. 모르면 아는 척을 하지 말아야 한다.
“고대 고구려인들의 신앙을 무시하고 민담 속 전쟁의 신인 치우천왕과 단군을 애써 우리 민족의 뿌리와 연결하는 태도는 역사라기보다는 종교에 가깝다”는 비난을 퍼붓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무책임한 단체에서 떠들어대는 근거 없는 말만을 옮긴 평자의 안목이 한심하지 않을 수 없다.
고구려연구재단은 고구려의 역사를 연구하는 단체이지 치우천왕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 단체가 아니다. 치우천왕· 배달국· 환인에 대한 기록이 후대에 나온다고 했는데, 이는 이 재단에서 이 방면의 역사에 전혀 연구가 없다는 고백일 뿐이다. 평자는 그런 말을 글로 옮기기 전에 먼저 눈치를 챘어야 하지 않은가?
중국의 <운급헌원기雲笈軒轅記>라는 책에서, “치우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의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구리로 된 머리에 쇠로 된 이마라고 말한다.”고 하였다. 이 시대에는 치우천왕, 유망, 황제 3인의 시대였다. 이들의 나라는 배달나라라는 거대한 국가 카테고리 안에 편성되어 있었고, 당시의 패권을 치우천왕이 쥐고 있었다. 황제가 이 연맹체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응징하기 위하여 치우천왕의 주도로 일어난 전쟁이 고구려의 발생지이자 청구의 옛 땅인 기주에서 일어났다. 최후의 결전지가 탁록이었다. 지금 중국은 이 땅에 귀근원歸根苑을 세우고, 귀근원 안에 中華三祖堂을 세워, 치우천왕 유망 황제 세분을 중국의 시조로 모시고 있다. 우리역사가들이 우리의 역사를 우습게 알고 있는 동안 중국이 우리의 역사를 돈 한푼 아니 들이고 가져간 것이다.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 “치우천왕의 능은 산동성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 관향성關鄕城 가운데에 있다. 높이가 7척으로 진한秦漢의 주민들이 10월이면 늘 여기에서 제를 지냈다.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 마치 필강疋絳같은 것이 뻗는데, 이를 치우기蚩尤旗라고 한다.”고 하였다. 치우기는 치우기로 불리는 혜성으로 옛날부터 치우기가 나타나면 전란이 일어난다고 하여 두려워하였던 별이다. 진은 단군조선을 멸망시켰고, 한은 위만조선을 멸망시켰다.
고구려연구재단의 연구원은 “요동성전투에서 당군에게 몰리자, 성주가 기원을 드렸다.”고 하였으므로 여기에서 치성의 모티브를 얻었을 것으로 추론하였다. 또한 “그러나 고구려인들은 단군이 아니라 시조인 주몽과 유화부인을 숭배했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이런 주장은 근거가 없는 엉터리 주장이다.
<송사宋史> 487권 외국外國 고려조高麗條에 “고구려는 하우夏禹시대에 기주冀州에 속했고 한漢나라 때는 현도군이었으며 지금은 요동遼東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기주冀州는 치우천왕이 황제와 10년 전쟁을 치룬 땅이다. 기주에 속한 땅인 탁록涿鹿(상商 이전에는 靑丘로 불렸다. 청구는 치우천왕의 나라였다.)에 치우천왕의 능인 치우재가 있다.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에 있는 능과 다른 능이 있는 것이다. 그곳에는 치우천왕이 황제와 대치하고 진을 쳤던 곳도 그대로 남아 있고, 치우천왕과 관련이 되는 지명과 유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곳이 한나라 때는 현도군이었고, 고구려가 발생한 곳이다. 이외에도 중국 사서에서 고구려의 연고지에 대한 기록이 다수 발견된다. 필자는 현지를 답사한 바 있다.
<五體通考> 201권에 “한무제가 설치한 현도․낙랑 두 군이 다 옛 우이嵎夷의 땅으로서 청주靑州(朝鮮句麗諸國 禹時實皆在靑域-<經稗>3권)지역에 있었다”고 하였다. <禹貢錐指>에 “동이 9족이 우이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단군조선)이라”고 하였다.
<經稗> 3권에는 “<후한서>와 <杜氏通典>이 동이 9종種을 우이라고 하였다. 그 땅이 한漢외 낙랑․ 현도군 지역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또 <禹貢論> 하에는 “단군조선이 뒤에 고구려가 되었다(朝鮮於後世爲高麗)”고 하였다. 고려는 고구려이다. 우이가 단군조선으로, 단군조선이 현도․ 낙랑으로 이름이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현도․ 낙랑이 원래 중국 땅이 아니라, 우이 즉 단군조선의 땅이었기 때문에 이름만 바뀌게 된 것이다.
<舊唐書> 199권 상에 “한 樂浪郡의 옛 땅에 고구려가 있었다”고 하였다. <梁書> 54권에는 “한무제가 조선(위만조선)을 멸망시킨 뒤 현도군을 설치하고 고구려를 현縣으로 삼아 여기에 소속시켰다고 하였다. 이것은 고구려가 현도․ 낙랑 지역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기록이, 고구려가 중국 땅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오늘날 중국으로 불리게 된 다양한 국가들이 치우천왕이 다스렸던 탁록(옛날의 청구-오늘날의 기주)인 단군조선의 땅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에 대하여는 <학역기學易紀> 6권에서 “당태종唐太宗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어진 임금으로써 멀리 있는 동이족을 쳤다(이현군벌원이以賢君伐遠夷)”고 한 것이다. 고구려를 이夷로 호칭하였다. 夷는 구이九夷-우이嵎夷이다. 우이는 중원 땅에 있었다. 원이遠夷는 멀리 떨어져 있는 오랑캐라는 말이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하여 원이(고구려-실제의 이름은 고구리이다)에게 간 것이다. <대역집의수언大易集義粹言> 8권에는 “唐太宗이 고구려를 쳤는데, 도둑질하러 들어간 침략이라고 하였다. (당태종지벌고구려唐太宗之伐高句麗 위구자야爲寇者也)” (이상은 심백강씨가 조사한 자료를 토대로 하여 기술한 것이다)
연개소문이 조의선인이냐 아니냐
평자는 조의선인이 등장하는 드라마에 대하여 “고구려사가들이 상가· 대로· 사자 등과 함께 관등 중의 하나였던 조의를 신라의 화랑 같은 군대로 표현한 것은 역사적 사실을 마음대로 조합한 결과”라고 성토하였다고 썼다. 왜 평자는 비평문을 쓰면서 연개소문과 관련이 있는 자료들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묻고 싶다.
‘연개소문’의 역사자문위원단의 일원인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도 조의군이 참전했다는 뚜렷한 근거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김소장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제가화상, 조의)이 고구려 때는 적을 막는데 선봉에 섰다’는 구절이 있어 무리한 추론은 아니라고 본다”고 덧붙여 이환경 작가의 구상에 힘을 실어 주었다고 덧붙였다.
조의선인에 대한 기록은 실세 역사가들이 위서로 취급하여 일고의 가치도 없는 책으로 보는 <규원사화>· <태백일사>와 같은 사서에 있다. 우리 선조는 역사를 오늘날의 실증사학자들처럼 고고학적인 유물을 조사하며 기록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역사서에 근거하여 기록하였다. 그분들은 실증이 불가능했던 시대에 살았으므로 직관을 중요시하였다. 간혹 직관으로 자신의 견해를 밝힌 곳이 있어서, 이러한 기록이 빌미가 되어 실력없고, 직관이 무엇인지 모르는 후세 실증사가들에게 배척을 받게 된 것이다.
<규원사화>는 “연개소문이 봉황산에서 10년 수도 끝에 도를 통하여, 만고에 뛰어난 호걸이 되었다”고 하였다.
고구려에는 대선大仙· 국선國仙· 조의皂衣 등의 관직이 있었다. 이러한 제도는 선仙으로 불리는 덕교德敎를 국교로 하였던 단군조선시대로부터 계승되어 온 유습이었다. 덕교에 무교巫敎를 합쳐서 신교神敎라고 하였다.
국선國仙에 대한 기록은 단군조선 11세 도해단군 때 나온다. 경인 원년(BC 1891년 도해단군이 오가에 명을 내려 12 명산의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의 소도蘇塗(수두라고도 불렸다)를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단군세기>) 12 명산에 소도를 세우고 국선을 1명씩 두었다면 소도에 소도를 관장하는 12인의 국선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곳에 많은 박달나무를 돌려 심고,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한웅천왕의 상으로 모시고, 여기에 제사지내며 웅상雄常(한웅천왕의 道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한웅천왕은 배달나라를 세우신 배달나라의 시조이다.
고구려에 국선이 있었다면, 국선보다 격이 높은 최고의 선인인 대선大仙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국선 밑에 조의皂衣가 있었다고 본다. 이들은 흑의黑衣를 입고 있었다. 당시에 이들이 소도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의로 불리게 되었다고 본다. 고구려에서는 소도 대신에 경당이라는 말을 썼다.
조皂자는 白+七자로 이루어진 문자이다. 白은 이들이 소도에서 제사를 올릴 때 백색장삼白色長衫을 입었음을 나타낸다. 七은 七星을 의미한다. 皂는 7사람의 조의를 뜻한다. 오늘날 무당은 칠성굿을 할 때 백색장삼을 입는다. 고구려의 유습으로 볼 수 있다.
신라에서는 화랑 중에 우두머리를 풍월주風月主라고 하였고, 풍월주 밑에 있는 7인의 화랑을 마복칠성摩服七星이라고 하였다. 마복의 색깔은 갈색이거나 백색인데, 조자와 바꾸어 슬 수 있는 말이다. 종교적인 의식(필자는 칠성굿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을 할 때 입었던 옷의 색깔로 보기 때문에 바꾸어 쓸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아마 고구려의 조의와 신라의 마복칠성에는 상통하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풍월風月은 우리 선조들의 나라인 한국· 배달나라· 조선의 총칭이었을 것이고, 풍風은 풍이족風夷族에서 오고, 월月은 조선朝鮮에서 왔을 것이다.
당시에 소도를 관장하는 세력으로 대선 1인, 국선 12인, 각 국선 밑에 조의 7인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데, 조인의 우두머리가 84명으로 이들이 신라에서 문무를 수련했던 화랑과 유사한 생활을 했을 것으로 본다.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조의皂衣의 직책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연개소문을 조의선인皁衣仙人이라고 했는데, 그의 직책이 大莫離支였으므로 조의선인 중에서 대막리지가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대선으로 볼 수 있다. 그가 9살 때 나라에서 조의로 선발되었다고 <태백일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신라 화랑의 선발과 유산한 점이다.
조의선인들이 검은 옷을 입은 것은 북쪽을 관장하는 고구려의 방위를 표시하고, 그들의 신분이 평민이 아님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흑색은 북극과 북극성을 표시하는 색깔이다. 그들이 북극성처럼 모든 것의 중심에 있다는 표시이다. 이들의 수가 수나라의 130만 대군과 대전을 치룰 때 20만 명이었다고 한다. 옛 단군조선의 땅에서 단군조선을 계승한 고구려의 12명산에 12소도가 있었으므로 각 소도에 배속된 조의는 8만 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각 소도가 조의군대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역사왜곡에 관하여
고구려사에서 역사왜곡은 있을 수 없다. 문제는 우리가 고구려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역사를 모른다는 것과 역사왜곡과는 전혀 다르다. 지금 역사를 왜곡하는 쪽은 중국이지 우리가 아니다.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역사를 찾아내어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응하는 대응논리를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구려역사에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은 많다. 해야 할 말을 제대로 하는 것과 편향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것과는 본질이 다르다. 우리가 편향적이어야 할 이유가 없고 그렇게 해야 할 필요도 없다. 내가 의문을 갖는 것은 평자가 말하는 무엇이 편향이고 또 무엇이 왜곡이냐 하는 것이다.
“여기에 공익을 표방하는 방송국에서 의도적으로 고구려의 역사를 편향적으로 왜곡한 드라마를 만들어 방송할 경우 한국전체의 신뢰에 막대한 악영향이 끼쳐질 수 있다. 각 나라는 영토의 문제에만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영토의 문제는 정치력과 국방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겠으나 역사와 문화의 부분은 시대를 이끌어가는 영향력이 있는 지성인들과의 대결을 이끌어 내고 결국 국민 전체의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힐 수 있다. 연개소문과 이환경 작가는 지금 잘 못 나가고 있다.”
나는 근거 없이 하는 이러한 말이 위험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연개소문>에서 고구려의 역사를 왜곡한다면 어떻게 왜곡을 한다는 말인가? 고구려군이 요동벌로 진군하는 것은 진시황 8년에 진에게 멸망하며 빼앗긴 단군조선의 영토와 황제에게 멸망한 치우천왕시대의 청구 옛 땅을 회복하러 가는 것이다. 고구려군을 다물군이라고 하였는데, 다물군에는 되물린다는 뜻이 있다고 한다. 되물린다는 것은 고구려의 실지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지회복은 치우천왕의 땅과 단군조선의 땅을 되찾는 것을 뜻한다. 그런 것이 역사왜곡이 될 수 있을까? 우리 역사에 무지하고 무식한 대부분의 지성인들이 무엇을 가지고 논쟁을 한단 말인가? 중국이 제기한 동북공정과 탐원공정에 대하여 지성인으로 불리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반론을 폈는가? 도대체 국민전체의 이미지란 무엇인가? 무슨 손상을 입힌다는 것인가?
나는 이환경 작가를 만나본 적이 없고, 그와 통화를 해 본 적도 없다. 나는 그가 의도하는 데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자, 이환경 작가가 무엇이 잘못 나가고 있는 것인지, 비평자가 문제를 제기한 만큼, 교사적인 우월한 지위에서 이점을 밝혀줄 의무가 있다고 본다.
불교가 고구려에 들어오기 이전에 있었던 고구려의 종교
불교가 소수림왕 2년에 고구려에 들어오기 이전에 조의선인에게서 보았듯이 고구려의 종교는 선교仙敎였다. 신라 말에 최치원 선생은 <난랑비서문>에서 유儒· 불彿· 도道 3교가 모두 선교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연개소문에서는 적극적으로 우리의 고유한 종교인 유· 불· 도의 종주가 되는 선교에 대하여 진지한 접근이 필요하다. 단군교는 후세에 생긴 종교로 상고시대의 선교가 아니다.
당시에는 한국의 삼신교三神敎, 배달나라의 태백진교太白眞敎, 단군조선의 덕교德敎와 무교巫敎(이를 합하여 神敎라고 하였다)가 모두 선교라는 명칭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종교가 종교로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곳이 소도였다. 소도에서 조의들이 이 일을 수행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역사와 종교를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종교는 역사의 일부분이다. 또한 문화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고대 고구려인들의 신앙을 무시하고 민담 속 전쟁의 신인 치우천왕과 단군을 애써 우리 민족의 뿌리와 연결하는 태도는 역사라기보다는 종교에 가깝다고 비판한 고구려사 역사학자들의 비판이 뜻하는 의미를 새겨들어야 한다.”고 비평자는 말했는데, 그런 말을 하는 고구려역사학자의 말은 안 들으면 안 들을수록 득이 된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 그 말이 알고 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드라마 제작진에게 보내는 박수
비평자는 이환경 작가가 “중국이 고대 동북변방의 역사연구에 관한 대규모 국책사업인 동북공정으로 고구려 역사를 왜곡하려 한다”는 고발정신을 연개소문에 담을 경우 드라마의 색깔은 사극의 색을 잃어버리게 되어 있다. 더하여 작가가 호언한대로 “중국은 이 드라마를 통하여 긴장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드라마에 담을 경우 이는 한국드라마 전체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이비작품이 예고된다고 우려를 표명하였다.
이런 주장처럼 황당무계한 주장은 없을 것이다. 작품에는 시대정신. 메시지가 필요하다. 고발정신이 있으면 더 좋다. 이러한 것이 사극에 필요하다.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하여 메시지 없는 작품을 만들어 보았자 그런 작품은 1회용 작품이 될 뿐이다.
군대가 할 수 없는 싸움, 나라가 할 수 없는 싸움을, 작가와 드라마 제작진과 방송국이 이왕 칼을 빼들었으니, 사활을 걸고 해 볼 수도 있지 않은가? 시대정신이란 무엇이고, 작가정신이란 무엇인가? 해보는 정신이 아닌가? 무식이 지식으로 판을 치고, 도둑질이 학문과 문화로 행세하는 이 사회에서 올바른 정신 하나 살려내는 것도 역사에 길이 남게 될 일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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