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족의 나라 졸본부여 고리국 연구
필자 불명 고대사학회
1. 머리말
우리
민족의 건국 신화 가운데 주몽이 고구려를 세웠다는 신화와 동명이 부여를 세웠다는 신화가 전해 온다. 두 신화는 건국 신화 가운데 가장 풍부한
요소를 갖추고 있어 이미 여러 학자들이 많이 연구하여 왔다. 그래서 두 신화는 줄거리가 아주 비슷할 뿐 아니라 신화 구조에서 볼 때 근원이
같다는 사실을 많은 학자들이 밝힌 바 있다. 그런데 두 신화를 한 개 신화로 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두 개 신화로 구별하는 이도
있다.
먼저 중국 일본 문헌에 보이는 두 신화를 건국 시조와 나라 이름에 따라 구별하면 아래와
같다.
논형
위략 후한서 수신기 양서 법원
나라이름 부여 부여 부여 부여 부여 부여
건국시조 동명
동명 동명 동명
동명
동명
위서 주서
수서 북사 통전
나라이름 고구려 고구려 고구려 고구려 고구려
건국시조 주몽 주몽 주몽 주몽 주몽 수서 북사속일본기
나라이름 백제 백제 백제
건국시조 동명 동명 도모
이 표를 보면 두 신화는 크게 세 갈래로 나뉨을 알 수 있다. 주몽은 고구려
건국 시조로, 동명은 부여.백제의 건국 시조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 신화가 고구려,부여, 백제의 기원 문제를 규명하는 열쇠가 됨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건국 시조 이름이 동명으로 되어 있는 신화와 주몽으로 되어 있는 신화를 각기 구별한 뒤, 두 신화를 신화 요소를
중심으로 살펴보아 두 신화가 개별 신화임을 밝히려 한다. 나아가 동명 건국 신화에 보이는 졸본부여와 고리국이란 나라가 과연 어떠한 나라였는가를
문헌 고증을 통해서 밝힐 것이다. 이를 통해 일명 맥족이라 불렸던 고구려족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나라를 세우게 되었는가 규명하는 데에 한
길잡이가 되리라 생각한다.
2. 동명 신화와 주몽 신화의 비교 분석
2-1. 동명신화
동명신화를 전하고
있는 가장 앞선 문헌은 왕충이란 동한의 학자가 기원 1세기에 지은 논형이다. 논형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옛날 북이
탁리국 왕의 시비가 임신하자 왕이 시비를 죽이려고 하였다. 시비가 답변하기를 “달걀 만한 기운이 하늘로부터 나에게 내려온 까닭에 임신했노라”고
하였다. 그 뒤에 아들을 낳았다. 돼지우리 안에 가져다 버렸더니 돼지가 입김으로 불어서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굿간으로 옮겨 말이 밟아 죽이게
하였더니 말이 다시 입김으로 불어서 죽지 않았다. 왕은 하늘이 낸 아이가 아닌가 의심해서 그 어머니더러 데려가 기르게 하였다. 이름을 동명이라
했는데 마소를 맡아서 기르게 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았다. 왕은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서 죽이려고 하였다. 동명이 달아나다가 남쪽으로
엄시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들이 떠서 다리로 되어 동명은 건널 수 있었다. 물고기와 자라들이 곧 흩어져서 추격해 오던 군사들은
건널 수 없었다. 동명이 이어서 부여에 도읍하고 임금이 되었다.
동명신화는 여러 자료에 전하고 있지만, 중국 문헌에만 보일 뿐 우리
문헌에는 단독으로 전하는 것이 없다. 여러 문헌에 전하고 있는 동명신화를 신화 요소에 따라 분석하면 아래와 같다.
책이름
인물 이름 잉태이유 출생형태 어미신분 출자국 欲殺者건넌 물
창건국 참 조
논 형 東明天氣生子王의 侍婢 槖離國 國王 掩호水 夫餘
위 략 東明天氣生子王의 侍婢 槀離國 國王 施掩水 夫餘
한 원 東明天氣生男王의 侍兒 고리국 國王 淹滯水 夫餘 후한서 인용
후 한 서 東明天氣生男王의 侍兒 索離國 國王 掩호水 夫餘
부여전 양 서 東明天氣生男王의 侍兒 索離國 國王 淹滯水 夫餘
수 서 東明 -生男王의 侍婢 高麗國 國王 淹 水 夫餘
백제전 북 사 東明天氣 生男王의 侍兒 索離國 國王 淹滯水 夫餘
백제전 법 원 東明 -生子王의 侍婢영품리왕 國王 - 夫餘
수 신 기 東明 - 生子王의 侍婢 索離國 國王 엄호수 夫餘
통 전 東明 -生子 - 索離國 國王 엄호수 夫餘부여전
속일본기 都慕 - - - - - - 夫餘
삼국유사 東明 - - - - - -卒本扶餘북부여기
2-2. 주몽신화
주몽 신화를 전하는 가장 오랜 기록은 광개토왕비문이다.
삼가
생각컨대 옛적 시조 추모왕께서 나라를 세우셨으니, 추모왕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 ........ 왕은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으며, 태어나자 곧 성명의 덕이 있었다.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부여의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었다. 왕은 나루에 이르러
물을 보고 말했다. “나는 황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다. 추모왕이 곧 나다. 어서 나를 위해 거북을 띄워 배로 삼고 갈대로 다리를
만들어라” 왕의 말소리에 따라 즉시 뜬 거북과 갈대로 이룬 다리가 나타났다. 왕을 즉시 강을 건너 비류곡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광개토왕비문에는 고구려 창업 과정을 알리면서 주몽 신화가 아주 간략하게 적혀 있다. 주몽 신화는 우리나라와 중국 문헌에
고루 실려 있다. 우리 문헌에는 중국 문헌에는 전하지 않는 풍부한 신화 요소가 담겨 있다.이규보가 쓴 영사시 동명왕편에 주석으로 인용하고
있는 옛 삼국사가 해모수가 하늘에서 강림하는 것이며, 하백과 재주를 겨루어 이기는 등 신비스럽고 영이한 내용을 가장 풍부하게 담고 있다.
여기 삼국유사의 기록을 옮긴다.
국사 「고려본기」에 이르기를 시조 동명 성제의 성은 고씨요 이름은 주몽이다. 처음에
북부여왕 해부루가 동부여로 자리를 피하고 나서 부루가 죽으매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 때에 왕은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나서
사정을 물었더니 그는 말하기를
“나는 본시 하백의 딸로써 이름은 유화인데 여러 아우들과 함께 나와 놀던 중 때마침 어떤 사나이가 있어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자칭하면서 나를 유인하여 웅신산 밑 압록강변의 방 속에서 알게 되고는 가서 돌아 오지 않았다.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남의 말을 들었다고 하여 드디어 이곳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다.”
고 하였다. 금와가 이를 이상히 여겨 방 속에 깊이 가두었더니 유화에게
햇빛이 비추었다. 유화는 몸을 끌어 이를 피하였으나 햇발은 또 쫓아와 비추곤 하였다. 이래서 태기가 있어 알 하나를 낳으니 크기가 다섯 되
들이는 되었다. 왕이 알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니 모두 먹지 않았다. 다시 알을 길바닥에 버렸더니 소와 말이 피해갔다. 알을 들에 버렸더니
새와 짐승이 덮어 주었다. 왕이 알을 쪼개려 하여도 깨뜨릴 수 없어 그만 그 어미에게 돌려주었다.어미는 알을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데 두었더니
아이 하나가 껍질을 깨고서 나왔는데 골격이나 외양이 영특하고 신기롭게 생겼었다. 나이 겨우 일곱 살에 뛰어나게 숙성하여 제 손으로 활과 살을
만들어 백번 쏘면 백 번 맞히었다. 이 나라 풍속에 활 잘 쏘는 이를 주몽이라 하므로 이름을 주몽이라 지었다.
금와가 아들 일곱이 있어
언제나 주몽과 함게 노는데 재주가 그를 따를 수 없었다. 맏아들 대소가 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니 만일 빨리 처치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후환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으나 왕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왕이 주몽을 시켜 말을 먹이게 하였더니 주몽은 그 중에
날쌘 말을 알아서 먹이를 덜 주어 여위도록 만들고 굼뜬 말은 잘 먹여서 살이 찌도록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을 자기가 타고 여윈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여러 왕자들과 여러 신하들이 장차 그를 모해코저 하는 것을 주몽의 어미가 알고 주몽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 나라 사람들이 장차
너를 해치려고 하는데 너 같은 재주를 가지고 어데로 간들 못 살 것인가 ? 빨리 손을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주몽은 오이 등 세 사람과 동무가 되어 엄수까지 와서 물에게 말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손자인데 오늘 도망을 가는 길에
뒤따르는 자가 쫓아 닥치니 이 일을 어쩔 것인가?”
하였다. 이 때에 고기와 자라가 나와 다리가 되어 물을 건너게 하고 나서 다리는 풀려
버려 추격하던 말 탄 자들은 물을 건널 수가 없었다. 주몽은 졸본주까지 와서 드디어 여기에 도읍하였다. 미처 궁실을 지을 사이도 없이 그저
비류수 가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따라서 고씨로 성을 삼으니 당시 나이가 열(삼국사기에는 스물) 두 살이요 한
나라 효원제 건소 2년 갑신에(기원전 37년) 즉위하고 왕으로 일컬었다.
주몽신화를 전하고 있는 기록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문 헌 인물이름 잉태이유 출생형태 어미신분 出自國妬忌者 건넌물(도착한
곳) 創建國 참조
위 서 朱蒙 日照 一卵 河伯女 夫餘夫餘人夫餘臣 一大水 (忽升骨城) 高句麗
주 서 朱蒙 感日 -河伯女 夫餘 - -(忽斗骨城) 高句麗
수 서 朱蒙 日照 一大 卵 河伯女 夫餘夫餘人 一大水 高句麗
북 사 朱蒙 日照 一卵 河伯女 夫餘夫餘人 夫餘臣 一大水(忽升骨城) 高句麗
통 전
朱蒙
日照 -河伯女 夫餘
國人
普述水(忽升骨城) 高句麗광개토왕
비문
鄒牟
- 卵 河伯女
北扶餘 -奄利大水(沸流谷忽本) -
모두루묘지 鄒牟 - -河伯女北夫餘 - - -
동명왕편 朱蒙 懷日 一卵 河伯長女 柳花東夫餘 太子 淹대水 高句麗
삼국사기 朱蒙 日炤 一卵河伯女東夫餘 王子諸臣 淹호水(卒本) -
고구려본기삼국사기 朱蒙 - - - - - - 卒本扶餘
고구려본기 주 삼국사기鄒牟 - - -北扶餘 - - 卒本扶餘
백제본기삼국사기 朱蒙 - - - 扶餘 - -(卒本) 高句麗
백제본기 주 삼국유사 朱蒙 日照 一卵 河伯女 柳花東夫餘 王子 諸臣 淹 水(卒本州) -
삼국유사 鄒牟 - - -北扶餘 - - 卒本扶餘
남부여조제왕운기 朱蒙 - 大卵河伯長女 柳花 扶餘 - -(馬韓 王儉城) 高句麗
세종실록지리지 朱蒙 懷日 卵河伯長女 柳花 扶餘 王子 蓋斯水(卒本) 高句麗
두 신화는 신화를 구성하는 최소의 구성 요소인 화소(話素:motif)에서 서로 공유하고 있는 요소와 서로
다른 요소가 있다. 먼저 두 신화에서 서로 공유하고 있는 신화 요소를 살펴본다.
2-4. 두 신화의 같은 점
이 두
신화가 공유하고 있는 설화의 구성요소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부계의 기원이 분명하지 않으나 모두 하늘과 관련시킨다는 점이
공통된다.
동명 신화에서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주몽신화에서는 주몽의 아버지가 해모수라고 나오지만 삼국사기에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자칭 천제의 아들”이라 하여 정체가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동명신화에서는 “크기가 달걀만한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여 동명의 출생에 하늘을 관련시키고 있고,주몽신화의 해모수의 ‘해’는 곧 ‘태양’이니 역시 하늘에 이어진다. 주몽이
삼국유사 왕력에는 단군의 아들로 되어 있으니, 해모수를 단군에 비기고 있어, 부여왕의 권위가 단군과 결부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둘째, 어려서 기아가 되나 동물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이 같다.
동명신화에는 갓난애인 동명을 돼지우리나 마굿간에 버리자 돼지와 말이
숨을 불어넣어 주는데, 이는 목축 경제의 신화 상징이 담긴 통과의례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
셋째, 말을 기르는 일을 맡았고 활을 잘
쏘았다는 것이 같다.
동명과 주몽은 둘 다 말을 기르는 일에 종사하였으며 활을 잘 쏘았다. 주몽이란 이름은 활을 잘 쏜다 해서 얻은
이름이었다. 단군이 도읍한 아사달이 또한 ‘활의 나라’인 궁홀(弓忽)로 알려져 있다. 두 신화는 단군신화 어떤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에서 만든 좋은 활을 중국 사람들은 맥궁이라 하였다. 고구려와 같은 종족인 예에서는 박달나무로 만든 단궁이란 활이 이름났다고 한다. 한편
고구려와 인접한 오환족도 또한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넷째, 달아날 때 어별이 가교를 놓아 건널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같다.
다섯째,
주인공이 추격하는 군사를 피하여 건넌 강 이름이 같다고 볼 수 있다.
돔명신화에서 동명이 건넌 강이 논형에는 엄호수,
위략에는 시엄수, 후한서에는 엄사수 그리고 양서에는 엄체수로 되어 있다. 위략의 시엄수는 엄시수가 글자가 엇바뀐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강 이름들은 글자꼴이 비슷하고 음도 비슷하니, 옮겨 적거나 간행할 때 착오가 일어났거나 서로 통용하는 글자일 수 있다.
공통으로 남는것은 ‘엄○수’이다.
주몽신화에서 주몽이 건넌 강은 중국 문헌인 위서 수서 북사에
<대수>라고 하고 강 이름이 나오지않았지만 우리 광개토왕비문에는 <엄리대수>,삼국유사에는 <엄수>,
구삼국사에는 <엄체수> 삼국사기에는 <엄호수>라 하였다. 논형의 엄호수는 삼국사기에 그대로
엄호수이고, 양서의 엄체수는 또한 그대로 구삼국사의 엄체수로 강 이름이 같다. 이처럼 두 신화에 보이는 강 이름은 어음이 공통성이
있다.이러한 공통성이 나타나는 까닭은 무엇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 첫째, 고리국에서 부여로 넘어오는 강과 부여에서
고구려로 넘어오는 강이 비록 상류,하류의 위치는 다르지만 결국 동일한 강일 경우이고, 둘째, 부여인과 고구려인이 동족이라서 큰 강은 비슷한
이름으로 불렀을 경우이다. ‘엄수’는 ‘대수’ 곧 ‘큰 강’이라 볼 수 있다.
여섯째, 출생한 나라에서 정치 박해를 피하여 새로운 천지를
향하여 가서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 같다.
이처럼 두 신화는 기본 짜임새와 내용에서 아주 비슷하다. 두 신화는 같은 계열의 신화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고구려 추모왕 신화는 부여 동명왕 신화를 그대로 취하였다고 보거나, 두 신화가 실은 한 신화인데 와전된 것이라 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래에서 보게 되듯이 두 신화는 엄연히 구분되는 별개의 신화인 것이다.
그러면 두 신화에서 공통한 요소가 나타나는 까닭은 무엇인가.
두 신화 인물 사이에는 어떤 역사적 연관이 있는가. 민족의 기원이 졸본부여인과 고구려인이 동일하기 때문에, 동일 민족으로서 동일 근원의 신화를
전해오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또 한 국가의 시조신화는 왕실의 전통성과 관련이 있다고 보아, 두 건국 시조는 왕실에서 어떤 관련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뭏든 두 신화는 고구려족과 부여족의 종족 기원을 해명하는 열쇠가 되는 신화이다. 하지만 신화는 신화를 지니고 있고 말해
왔던 사람들의 생활이나 의식과 관련시키는 한에서만 참다운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두 신화의 성립 배경을 폭넓게 추구하지 않으면 이 문제를
올바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2-3. 두 신화의 다른 점
두 신화에서 서로 달리 나타나는 요소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잉태 경위가 다르다.
임신의 계기가 동명신화에서는 天氣感情이고 주몽신화에서는 日光感情이다. 동명신화에서는 바로 남아를
낳았지만, 주몽신화에서는 큰알(大卵)을 낳았다. 동명은 직접 사람의 몸으로 출생하였지만 주몽은 신비스러운 탄생으로 되어 있다. 동명 신화는
기생이고,주몽 신화는 난생이다. 위략에 적힌 동명 신화는 ‘달걀’이라 하여 난생신화의 요소가 들어가 있으나 동명이 바로 알에서 생겨
나왔다 하지 않고 기에서 생겨났다고 하였으니 난생이라 하기 어렵다.
둘째, 어머니의 신분이 다르다.
주인공의 어머니가 동명 신화에선
국왕의 시비(시아)이고,주몽 신화에선 하백의 딸(장녀) 유화이다.
셋째, 주인공을 죽이려 한 인물이 다르다.
동명 신화에서는 왕위를
빼앗길까 염려한 국왕이 죽이려 하였고, 주몽 신화에서는 왕자.신하들이 시기하여 죽이려 음모를 꾸몄다고 되어 있다. 더욱이 주몽 신화에서는 왕자와
신하들이 주몽을 죽이자고 간해도 왕이 이를 듣지 않았다고 하였다.
넷째, 주인공이 국가를 창건할 때 도움을 주는 인물이 주몽신화에만
나타난다.
넷째,주인공이 출생한 나라와 창건한 나라가 다르다.
동명 신화에는 동명이 고리국에서 태어나 남쪽으로 달아나 부여를 세운
것으로 되어있음에 반하여,주몽 신화에는 부여에서 태어나 고구려국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 두 가지 걸림돌이
있다.
우선, 동명이 나온 북이의 나라가 문헌에 따라 ‘탁리국’‘고리국’‘색리국’ 등 여러 가지로 전하고 있다. 이들은 발음은 서로 다르나
글자의 형태가 서로 비슷한 것으로 보아 (槖,索,槀) 옮겨쓰는 과정에서 잘못 씌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느 것이 올바른 것인지 논란이
많다.
그런데 ,수서에는 동명의 출자국을 <고려>라고 하였다. 어떤 이는 수서 백제전의 이 기사는 두찬이라거나
고구려와 부여를 역사로나 지리로나 엇바꿔 놓은 것이라 보고 있다. 하지만 수서를 비롯하여 주서 북사 등은 모두 7세기
전반에 편찬한 것이거니와 이들 사서에는 이전 시기 사서와 비교할 때 백제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이는
그만큼 백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결과이다. 수서의 기사는 단순히 잘못 적은 것이거나 찬자가 고리국이 고려국이라고 자의로 해석한 것이
아니다. 수서 백제전은 바로 앞에 고려전이 있다. 따라서 동명의 출자국을 고려국이라 할 때 그만큼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니 고리 두 글자를
모두 두 번 씩이나 고려로 잘못 적을 리도 없다. 어떤 자료엔가 근거를 두고 쓴 것이다.
당나라 덕종 년간에 두우는 통전을
편찬하면서 수서의 이 기사에 의문을 품은 듯 하다.
두우는 수서 백제전에 따르면 부여국이 고구려의 남쪽에 있게 되는데,
수서 고려전이나 후한서 삼국지 위서 등에 따르면 반대로 부여국이 고구려의 북쪽에 있게 되어, 탁리가 부여의 북쪽에
있는 별도의 나라가 아닌가 여겨지지만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두우는 수서 고려전과 백제전 사이에 서로 모순되는 기사를
어느 한 쪽을 부정하지 않고 사료를 존중하여 두 쪽을 모두 인정하여 탁리(고려)국이 부여의 북쪽에 있는 별도의 나라가 아닌가 추측하였다. 두우는
두 개의 고려국을 상정한 셈이다. 하나는 부여의 북쪽에 있는 고려국이고 다른 하나는 부여의 남쪽에 있는 고려국이다. 앞것은 주몽이 건국한
고구려이고 뒷것은 동명의 출자국인 고구려이다. 우리는 수서에 따라서 논형의 탁리국이나 위략의 고리국은 高麗(고구려)라고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 주몽이 남하한 부여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광개토왕비문과 모두루묘지에서는 북부여로,
구삼국사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는 동부여로, 그리고 위서 주서 수서 양서 등에서는 부여로 되어
있다. 주몽의 출신국에 대해서는 고구려 왕실에서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고구려 왕실에서 세운 광개토왕비문과
고구려 귀족인 모두루묘지에 전하는 북부여로 보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이상의 내용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름잉태이유출생형태어미 신분 출자국 시해자 건넌물창건국동명신화 동명 天氣 아이왕의 시비 고리국 국왕 엄○수 부여주몽신화 주몽 日感
알하백의 딸(북)부여왕자,대신(엄리)대수고구려
이처럼 두 신화는 주요 화소가 달리 나타나고 있다. 이는 궁극으로 두 신화가 서로 다른 시조
신화이기 때문이다. 동명 신화는 ‘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에 대한 기록이요, 주몽 신화는 ‘고구려의 건국 시조’인 주몽에 대한
기록이다.
우리는 동명신화와 주몽신화가 각기 다른 신화임을 신화 요소를 분석하여 알게 되었다. 동명신화와 주몽신화가 서로 다른
신화인 점은 신화 자체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자료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첫째, 고구려인들이 남긴 금석문에 나타나 있다. 1922년
중국 낙양에서 연개소문의 아들인 천남산의 묘지명이 출토되었다. 그 묘지명에 이러한 구절이 있다.
옛날에 동명이 기를 느끼고 호천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은 해를 품어 패수에 임해 수도를 열었다.
여기 보이는 ‘동명감기’와 ‘주몽잉일’은 두 신화의 한 조각
여운을 전하고 있다. 이 묘지명은 동명과 주몽을 분명히 구별하고 있어 동명과 주몽이 다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동명의 사적을 먼저
말하고 주몽을 사적을 뒤에 적고 있어 동명이 주몽보다 시기가 앞선 인물임을 알려준다고 하겠다.
둘째, 중국의 역사서에 동명과 주몽은 서로
다른 인물로 되어 있다. 동명은 부여 시조이고, 주몽은 고구려 시조는 주몽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 점은 이미 살펴본 바이지만 다시 한번 소상하게
살펴보자.
부 여 고 구 려 백 제삼 국 지東明후 한 서東明위 서 朱蒙(出於夫餘)
(其先出自夫餘)
양 서 東明 [고구려전] (夫餘東明의後支)
주 서 朱蒙(出於夫餘)仇台(夫餘支別種)수 서東明(出自高麗國)
[백제전] 朱蒙(出於夫餘)仇台(夫餘東明之後)
북 사東明(出自索離國)[백제전] 朱蒙(出於夫餘)仇台(夫餘東明支後)
신구당서 (夫餘別種) (夫餘別種)
통 전 東明(出於槖離國) 朱蒙(出於夫餘)仇台(夫餘尉仇台之後)
위 표에서 보듯이 삼국지와 후한서는 동명신화를 고구려전이 아니라 부여전에 넣어 동명신화가
부여 건국신화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양서에서는 동명신화를 고구려전에 실고 있어, 동명과 고구려가 어떠한 관계인가 다시 의문을 갖게
한다. 하지만 첫머리에서 “고구려의 조상은 동명에서 나왔다.”고 하고, 다시 “그 후예가 따로 갈라져서 고구려 종족이 된 것이다.”고 하여,
동명의 부여와 고구려의 관계에 대해서 부여 동명의 후손 중 한 갈래가 고구려를 세웠다고 밝히고 있다. 동명은 원래 부여의 건국자이지만 고구려는
동명의 후손이 세웠기 때문에 동명이 고구려의 조상도 된다는 이치이다.
더욱이 수서와 북사에서는 백제전에는 동명신화,
고구려전에는 주몽신화를 구분하여 적어 두 신화가 각각 두 나라의 시조신화를 알려주고 있다. 통전에서도 부여와 고구려 건국신화를 함께 적고
있지만, 부여의 시조는 동명, 고구려 시조는 주몽이라 하여 수서 북사와 마찬가지로 두 신화가 별개의 건국신화임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 이미 조선 성종 때에 시관 김천령이 <고구려부>에서
동명이 그 빛나는 업을 열고, 주몽이 그
여파를 이었도다.
라 읊은 적이 있다. 동명과 주몽을 구별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도 “동명은 북부여 시조의 이름임이 명백하니
주몽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하였다. 정약용도 동명과 주몽을 다른 인물로 생각한 것이다. 한치윤도 “대저 동명이 고리국으로부터 도망하여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고 그 후손 주몽이 부여국으로부터 도망하여 홀승골성에 이르러 살았다.저들이 난을 피해 도망한 것과 거북이 다리를 놓아 물을
건넌 일이 서로 우연히 같으나 동명은 본디 부여의 왕이요,주몽은 본디 고구려의 왕이다.”하고 말하였다. 나아가 한치윤은 주몽이 동명의 후손이라
하였다.
3. 졸본부여 시조 동명
중국 문헌은 동명과 주몽을 분리하여 이해하고 있으며, 나아가 동명의 지파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했다고 말하였다. 수서 북사에서 백제 시조 구대를 ‘부여 동명의 후손’이라 하였고, 양서에서는 고구려
시조를 ‘부여 동명의 후손 갈래’이라 하였다. 여기에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우리 문헌에 보이는 백제 시조 우태,비류,온조 등도
동명의 후손이라 볼 때 부여족이 세운 국가는 모두 동명에서 갈려져 나온 것임을 알게 된다.
3-1. 백제 시조
동명
백제에서는 동명을 시조로 내세웠다. 삼국사기 제사지에 인용된 해동고기는 백제의 시조를 동명이라 한 기록이 김부식
당시까지 전해오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동명묘에 대한 제사가 여러 차례 보인다.
여기 백제가 시조로
모신 동명이 고구려 주몽을 가리키는지 의심스럽다. 백제가 시조로 모신 동명과 고구려 시조 주몽은 역사적으로 다른 존재였다고 보아야 될 것이다.
정경희는 백제에서 시조로 모신 동명왕이 고구려의 주몽을 가리키지 않았으며 그 둘은 다른 존재였다고 했다. 서대석도 온조가 세운 동명왕묘는 부여의
시조로서 부여에서 숭앙하던 동명을 제사하기 위한 시조묘였고 그 제전에서 전승된 동명신화는 북이의 동명신화였다고 하였다. 이처럼 백제가 시조로
모신 동명은 부여 시조 동명왕이었다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위서 「백제전」의 북위에 보낸 백제의 서한에도 자기네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기원해 나왔다”고 하는 말이 있다. 여기서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는 말도 백제가 고구려의 시조로부터 나왔다는 뜻이라기보다, 백제와 고구려의 기원이 같은 부여라는 뜻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중국 문헌에서 백제에 대해서 부여 동명의 후손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백제는 졸본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위 기사의 부여는 졸본부여일 것이니,동명은 졸본부여의 시조인 것이다. 또,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는데
졸본부여 왕은 아들이 없었다. 주몽을 보고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자기 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는데 왕이 죽자 고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하였다.
고구려와 백제는 다 함께 졸본부여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백제에는 온조신화가 건국신화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이
분명한데, 동명신화를 따로이 내세운 까닭은 무엇일까. 온조가 백제를 건국한 실제 시조이지만 백제는 부여를 계승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동명을 관념적 시조로 모셨다고 하겠다. 동명은 고구려 시조이기 이전에 이미 졸본부여의 시조이다. 백제는 졸본부여에서 나왔으니 백제에서는
(졸본)부여를 계승한다는 의식에서 동명묘를 설치하고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백제 성왕이 도읍을 사비로 옮긱 국호를 남부여라 한 것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3-2. 동명의 연대
3-2-1. 동명의 계보
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 왕실과 귀족은
일본으로 많이 이주하였다. 일본 사서인 속일본기에 “백제 태조 도모왕”이란 기사가 보인다. 여기서 도모는 동명을 달리 적은
것이다.
백제 태조 도모왕의 후손을 신찬성씨록에서 찾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管野朝臣 出自 百濟國 都慕王 十世孫
貴首王之後也
② 和朝臣 出自 百濟國 都慕王 十八世孫 武寧王也
①에서 귀수왕이 도모왕 10세손이라 하였고, ②에서 무령왕이
도모왕 18세손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귀수왕과 무령왕은 8세손이 차이진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왕위 계승 관계를 정리하면 표와
같다.
도 모 예씨 = 주몽 = 서소노 = 우태 1세 비류 <1> 온조왕 2세 <2> 다루왕 3세
<3> 기루왕 4세 <4> 개루왕 5세 <5> 초고왕 <8>고이왕 6세 <6> 구수왕
<9>책계왕 7세<7>사반왕 <11> 비류왕<10>분서왕 8세 <13>
근초고왕<12>계 왕 9세 <14> 근구수왕 10세 <15> 침류왕<16>진사왕 11세
<17> 아신왕 12세 <18> 전지왕 13세<19>구이신왕 <20> 비유왕 14세
<21> 개로왕 15세<22>문주왕 곤 지 16세<23>삼근왕<24>동성왕
17세<25>무령왕 18세<26>성 왕 19세<27>위덕왕 20세 <28>혜 왕
21세<29>법 왕 22세<30>무 왕 23세<31>의자왕
이 표를 보면 무령왕은 귀수왕의 8세손이다.
근구수왕은 온조왕의 8세손이다. 귀수왕의 9세 선조는 온조왕의 부친인 주몽이나 우대일 것이다. 그런데 주몽의 부친는 해모수이므로 근구수의 10세
선조는 해모수이거나 우대의 부친 혹은 연타발일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귀수왕의 10세 선조인 도모왕은 온조왕보다 2세 앞선 인물이다. 이로써
백제에서 시조로 모신 동명(도모)이 고구려 시조 주몽과 역사상 다른 인물임이 더욱 더 분명하여졌다.
3-2-3 주몽을 동명이라
부르는 까닭
주인공 이름이 동명 신화에서는 ‘동명’으로,주몽 신화에선 ‘주몽’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주몽신화를 전하고 있는 문헌
가운데 동명이란 이름이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 신화 안에서 이름은 모두 주몽으로 일관하고 있고, 동명은 다만 시호로 되어 있을
따름이다. 동명은 주몽의 추호(追諡)라고 여겨진다.
그러면 어찌하여 고구려 시조 주몽을 동명이라 부르게 되었는가.
고구려는 10월에
하늘에 제사지내는 국중대회가 있어 동맹이라 일컬었는데, 이 동맹을 동명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로 보아 동맹은 동명과 통하는 말로서, 동명은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과 관련된 말임을 알 수 있다. 동명은 ‘하늘에 제사지내는 제사의 주재자’를 가리킨 말, 다시말해 ‘천제의 아들’이란 뜻을
가진 말이 아닐까 여겨진다. 논형에서 시비가 낳은 아이가 ‘하늘의 아들’인 줄 알았다고 하면서 아이 이름을 ‘동명’이라 한 것이 이 점이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동명은 당시 사회에서 종교적으로 신성한 권능자로 여겨지고 있었고,그러한 동명의 신성한 권능은 후대 왕들에게 계승되어야 하는
것으로 의식하고 있었다고 볼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주몽은 동명왕이란 시호(추호)를 지닐 수 있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동명이란 말이 어떤
신성한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볼 때, 주몽을 하늘의 아들로 신성하게 본 데서 주몽을 동명이라고 불렀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4. 고리국
동명신화에서 동명의 출자국으로 되어 있는 <고리국>은 과연 어떠한
나라인가.
<고리국>은 앞서 살펴본 바 수서에서 똑똑히 밝힌대로 <고려국>이다. 이 고려국은 주몽의 고구려가
있는 (졸본)부여의 (서)북쪽에 있는 또 하나의 고구려이다. 주몽이 세운 고구려 이전에 또 하나의 고구려가 있었던 것이다.
4-1. 역사상의 고리국
4-1-1. 고구려와 구려(현도군 고구려현)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기원전
37년보다 앞서 고구려의 존재가 역사상에 나타나고 있다. 한나라가 위씨조선을 침략하여 멸망시키고 그곳에 설치한 사군의 하나로 현도군이 있는 바,
이 현도군 속현으로 ‘고구려현’이 보인다. 이때는 기원전 107년이다. 현도군 설치 이전에 이미 고구려가 있었기에 고구려로써 현을 삼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고구려에 관한 이른 기록은 한서 「왕망전」과 「지리지」에 보인다.
한서 「왕망전」에 시건국
4년(기원 12년) 왕망이 고구려의 병력을 징발하여 호를 정벌하는 데 충당하니 가려고 하지 않고 군에서 강제로 보내니 다들 도망하여 새에서
벗어나 도둑질을 하므로, 요서 대윤 전담이 추격하였으나 피살되었다고 하면서,고구려를 고쳐 하구려라고 천하에 포고하여 널리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당시 주몽의 고구려는 독립국이었다. 독립국이 자기 나라 병사를 다른 나라에 징발당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왕망전에 보이는 고구려는
주몽의 고구려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한서 지리지의 현도군에 대한 주석에 ‘고구려를 왕망이 하구려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왕망이
하구려라 고쳐 부른 고구려는 한 현도군 고구려현을 가리킴이 틀림없다.
한서 지리지 현도군 고구려현에 대한 주석에서 후한 시대 학자
“응소가 옛 구려 호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현도군 고구려현이 고구려 사람들이 살던 곳이라는 뜻으로, 당시 주몽의 고구려와는 구별하여
“옛” 구려 호라고 불렀을 것이다. 과연 후한서에는 고구려와 구려를 구별하여 고구려전과 구려전을 따로 세우고 있다. 후한서에서는
대체로 구려는 고구려와 구별하여 쓰고 있다. 후한서 예전에 “예와 옥저 그리고 구려는 본디 조선의 땅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어 이
조선에 대해서 “기자가 봉을 받았다.”고 쓴 것으로 보아 이 조선은 위씨조선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 또 위씨조선이 고구려 지역까지 차지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구려는 다름아닌 현도군의 고구려현 지역을 가리킬 것이다. 위씨조선은 일찍이 진번을 침략하여 자기 강역으로 삼은
적이 있는데 이 진번 지역에 현도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후한서 동이전에는 고구려전과 구려전이 있는 바, 고구려전은 주몽의
고구려국에 관한 것이고, 구려전은 현도군 고구려현에 관한 것으로 구별하였다고 생각한다.
앞서 우리는 두 개의 고려국이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주몽이 건국한 고구려로 부여의 남쪽에 있는 고려국이고, 다른 하나는 동명의 출자국인 고구려로 졸본부여의 북쪽에 있다고 했다. 동명의
고려국은 달리 고리국이라고도 불렸다. 비록 한서에는 현도군 고구려현을 고리국이라고 적지 않고 고구려라 적고 있지만,수서
통전 등에서 고리국이 고구려라 했으므로 이 고구려가 바로 주몽의 고구려보다 앞서 존재했던 고구려(고리국)일 것이다.
더욱이 왕망이
이 고구려를 하구려라고 하였다 하니, 고구려의 이름은 원래 구려가 주로 되어 거기에 아름답게 또는 위대하게 형용하는 뜻으로 고자를 붙인 듯하며,
이와 반대로 왕망은 멸시와 미움에서 하자를 붙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고나 하는 2차적인 형용사요, 본디말은 구리,구려일 것이다. 이
점 또한 현도군 고구려현의 ‘고구려’가 ‘고리국’이라는 한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논형의 고리국이 한
현도군 고구려현 지역을 가리킴을 알게 되었다. 이 고구려현은 주몽의 고구려국과 구별하기 위해 구려라고 불리기도 했음도 알게
되었다.
4-1-2 동호와 진번
사기 「조선열전」에 “연나라는 전성하기 시작하던 때로부터 일찍이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려고 장새를 쌓았다”고 하였다. 위략에는 “연은 장군 진개를 보내어 조선의 서방을 공격하여 이천리의 땅을
빼앗고 만번한에 이르러 경계를 삼았다.”고 하였다. 사기 흉노열전에는 “연 진개가 동호에 인질로 있을 때 호(동호)는 진개를 깊이
믿었는데 진개는 돌아와 동호를 습격하여 파하니 동호는 천여리를 물러났다.”고 하였다. 염철론에 “연은 동호를 습격하여 격파하여 천리
밖으로 밀어내고, 요수를 건너 동으로 조선을 공격하였다.”라고 하였다.
이 네 기사는 한 가지 사건을 표현을 달리해서 적고 있다.
「염철론을 보면 진개의 군사 행동은 1차로 동호를 밀어내고 이어 2차로 조선을 공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흉노열전」은
단지 동호에 대한 일만 적은 것이고,위략은 동호의 일까지 조선에 포함시켜 적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어째서 어환은 동호는 쓰지 않고
다만 조선이라고만 썼을까.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동호를 조선의 한 부분으로 보았기 때문일까. 그런데, 위략에는 호가 조선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인 예가 있다. 위만이 조선으로 망명할 때 호복을 입었으니, 조선의 옷이 호복이었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조선 옷을 호복이라
부른다면 조선이 바로 동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호를 바로 조선이라 할 수는 없다. 염철론에 동호와 조선을 분명히 구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조선열전」에는 연이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복속하였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호에게 천여리를 땅을 잃은 동호는
후일 진나라 시기에 다시 강성하여 흉노를 압박하기도 하지만, 한초에 흉노에게 멸망당한다. 이 동호와 흉노 사이에는 천여리의 공지가 있었는데,
그곳은 동호의 ‘棄地’였다. 아마 이 ‘버린 땅’ 천여리가 연의 침략을 받은 동호가 버리고 달아난 땅일 것이다.
4-1-2-1
동호와 진번
한서 왕망전에 보면 호(동호)를 치는 데 현도군의 고구려현 사람들을 동원하고 있는데, 이 점을 보아 고구려현이
동호와 가까운 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현이 들어 있는 현도군은 이전에 진번 지역이었다. 그렇다면 동호는 진번과 같은 곳이거나 가까운
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4-1-2-2 진번과 고리국
진번은 어떠한 나라인가.
사기색은은 진번 조선을
‘두 나라’라고 주해하여 진번과 조선을 각각 독립국으로 다루고 있다. 사기집해에는 이 진번을 ‘막’이라 적고 있는 문헌이 있다고 했는데,
고대 중국에서 맥은 ‘막’과 비슷한 소리로 불리웠고, 집해의 이 구절을 반절을 나타내던 어떤 대목의 남은 부분이라 본다면 맥으로 읽을 수
있어 진번국은 바로 맥족의 나라임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앞에서 논형의 고리국이 있던 곳이 현도군 고구려현 지역과 같은 곳임을
밝혔다. 그런데 현도군은 진번 지역에 있었으므로, 고리국은 진번 지역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곳에 있던 진번국은 맥족의 나라였다.
역시 이곳에 있던 고리국도 맥족의 나라이다. 그렇다면 진번국과 고리국은 같은 지역에 있었던 셈이니 같은 나라이거나 적어도 시기를 달리하여 같은
곳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4-1-2-3 고리국과 동호
앞서 동호는 진번과 같은 곳이거나 가까운 곳에 있음을 밝혔다.
다시 진번 지역에 있던 진번국과 고리국은 같은 나라이거나 적어도 시기를 달리하여 같은 곳에 있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동호는 이 고리국과 같은
곳이거나 가까운 곳에 있었을 것이다.
한편 사기에 동호를 달리 북이로 적고 있는데, 논형에는 고리국이 북이라 하였다.
논형에 따르면 고리국에 국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사기에 따르면 동호에도 국왕이 있었다. 그런데 고리국에 대해서는 문헌에
국명과 간단한 신화만 있을 뿐이고 역사 자료는 없는 것으로 보아 일찍이 멸망하였으리라 여겨진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우리는 흉노에게 멸망당한
동호가 바로 북이 고리국이라 짐작할 수 있다.
4-1-3 소수맥/대수맥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고구려가 큰 강에
의거하여 나라를 세우고 살았는데...고구려의 딴 종족이 작은 강에 의거하여 나라를 세웠으므로 소수맥”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대수에
의거하여 나라를 세우고 살고 있는 구려는 바로 주몽의 고구려를 말한 것이다. 이 기사는 간략하지만 고구려 초기의 역사를 명확히 반영하여 주고
있다. 어째서 두 갈래로 갈라졌는지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대수가에 사는 고구려(대수맥)와 소수가에 사는 고구려 별종인 소수맥의 두 갈래로 나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몽의 고구려국 이외에 소수에 의거하여 나라를 세우고 살고 있는 소수맥은 어떤 나라인가.
먼저 소수맥이 살았다는
소수가 어느 곳에 있는지를 알아보자. 이 소수에 대해서 “요동군 서안평현의 북쪽에 소수가 있는데 남쪽으로 흘러서 바다에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현도군 속현인 서개마현의 주석에 서안평현이 보인다. “서개마현에는 마자수가 있다. 마자수는 서북쪽으로 흘러 염난수에 들어간다. 염난수는 거기서
서남쪽으로 흘러 요동군 서안평현에 이른다”고 하였다. 마자수와 염난수가 흐르는 방향을 보면 서개마현은 서안평현에서 가까운 곳에 있음을 알 수
있으니, 소수 또한 이 두 지역에서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다. 결국 소수맥은 현도군 가까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현도군 일대에서
고구려족이 세운 고리국을 떠올리게 된다. 소수맥국은 아마 고리국과 같은 나라이거나 적어도 같은 지역에 시기를 달리하여 있었던 나라일 것이다.
아마 중국인들은 주몽이 세운 고구려를 대수맥이라 하고, 그 서쪽에서 현도군에게 통할 당하고 있던 고구려 별종을 소수에 거주한다고 하여
소수맥이라고 부른 듯하다.
4-1-4. 산해경의 맥국
산해경에 “동호는 대택의 동쪽에 있고, 이인은
동호의 동쪽에 있다. 맥국이 한수의 동북쪽에 있는데, 연나라에 가까워 연나라에게 멸망하였다.”고 적혀 있다. 여기 맥국은 ‘맥족의 나라’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삼국지 후한서에 맥족의 나라로 대수맥과 소수맥이 알려져 있다. 대수맥의 나라는 주몽의 고구려국이다.
소수맥은 소수에 의거해서 나라를 세웠기에 소수맥이라 불렸다. 산해경의 맥국은 삼국지 후한서의 소수맥과 같은 나라일 것이다.
아울러 후한서에 소수맥에서 나오는 좋은 활을 맥궁라 한 점도 소수맥의 나라가 맥국이라 불렸던 다른 한 근거로 삼을 수
있다.
산해경에서 맥국이 연에게 망하였다 했는데,이는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침략을 받아 동호(진번)가 천여리 물러난 일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산해경에 보이는 맥국이 바로 소수맥이며 또한 연에게 복속당한 진번국임을 보았다. 소수맥국이 옛 진번인
현도군 고구려현 지역에 있는 고리국(동호)임도 보았다.
4-2.맥국의 사회 구성
앞서 산해경의 맥국 관련
기사에서 맥국의 사회 구성을 엿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기사를 “동호는 대택의 동쪽에 있고, 이인은 동호의 동쪽에 있다.”는 부분과
“맥국이 한수의 동북쪽에 있는데, 연나라에 가까워 연나라에게 멸망하였다.”로 구분하였다. 이때 뒷 부분이 앞 부분에 대해서 어떠한 설명을 하고
있다고 보았다.그렇다면 맥국은 ‘동호-이인’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몇 가지 자료를 보태어 이를 뒷받침하려고 한다.
한서 지리지 현도군에 대해서 응소는 “고진번조선호국”이라고 주석하였다. 이 구절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문맥으로 보아
“고진번”은 현도군의 연혁을 설명하는 대목이니 “현도군은 예전에 진번이 있던 곳에 설치하였다.”는 뜻으로 볼 수 있고,“조선호국”은 다시 바로
앞의 “진번”을 받아서 “진번은 조선의 호국”이라고 풀이하는 것이 순리에 맞을 듯 하다. 응소는 또 고구려현에 대해서 “고구려호”라고
주석하였는데 이 말은 고구려현의 명칭이 “옛 구려호”에서 유래하였다는 뜻으로 여겨진다. 응소가 살던 후한 시대에는 “구려”라는 말만으로도
“고구려”와 구별이 되었는데,“구려”에 다시 “호”를 붙여 쓰고 있음을 보아, 구려족이 ‘호’와 어떠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삼국지에는 고구려를 호와 동일하게 보는 듯한 구절이 있다.
현도군의 동쪽 경계에 작은 성을 쌓고서 그곳에 조복과
의책을 두어 해마다 고구려인이 그 성에 와서 가져가게 하였다. 지금도 호는 이 성을 책구루라 부른다. 구루란 구려 사람들이 성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 ‘호’를 바로 고구려라고 보기는 어렵고 ‘동호’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순리일 듯하다. 그렇다면 진번이
‘조선-호(동호)’의 종족 구성을 보이고, 고리국(고구려현)은 ‘구려-호(동호)’의 종족 구성을 보이니 이는 산해경에서 맥국이
‘동호-이인’으로 이루어진 나라임을 추측한 것과 거의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맥족은 고구려족을 가리키는데, 이 ‘맥’이 ‘호’와 함께
쓰여서 호맥을 연칭한 예는 수없이 많다. 몇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古者禹治天下...以利燕代胡貉與西河之民 (墨子
兼愛篇)
雖北者 旦不一屠何 其所次於燕代胡貉之間者 亦以攻戰也 (墨子 兼愛篇)
趙襄子踰句注而破幷代以臨胡貉 (사기
흉노전)
호맥을 동일족으로 보기에는 호와 맥의 역사적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개별적 존재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이
‘호맥’이란 말은 다만 당시 호와 맥의 거주지가 동일 방향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에 그치는 것일까. 우리는 이 ‘호맥’이란 말이 맥족의 나라인
맥국이나 고리국의 종족 구성을 보여주는 말이라 생각한다. 고리국이나 맥국은 ‘동호와 이인’ 또는 ‘동호와 맥족’이라는 두 종족이 연합한
국가였다. 동호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동호의 후예인 오환에 대해서 후한서 오환전에 “오환은 말타고 활쏘기를 잘한다.”고
하였고 또 오환 사람은 “동쪽으로 해를 향해 절을 한다.”하여 해(태양)을 숭배하는 신앙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두 종족은 오랜 동안 함께
살아서 서로 많이 융합되어 동호족이 맥족과 같은 기질과 신앙이 있게 된 것이다.
5. 고구려/졸본부여/고리국/진번국 건국
시기
고구려의 역년에 대해서 몇 가지 이설이 있었다. 먼저 이를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다.
기 사 출 전
700년 설 今此國亡者當在七百年之末也
일본서기 천지기 705년 설 二十八王 七百五年
삼국사기 연표 708년 설 自高麗初立至邦破以來七百八年
고자 묘지명 800년 설 太祖中牟王....年將八百
문무왕 안승 책봉문 900년 설 不及九百年 當有八十大將來滅之
신당서 고려비기1000년 설 不及千年 當有八十老將來滅之 당회요 고려비기
5-1.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시기
이때까지 주몽의 고구려 건국 연대에 의심을 두는 이들이
있다. 이기백은 현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고구려의 건국이 기원전 37년으로 되어 있는 것은, 필시 통일신라 때에 신라인이
조작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신라 건국 년조를 늘리고 고구려의 년조를 줄인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기원전 37년 건국하여 기원 668년까지 705년 동안 존속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기록은 믿을만한 것이라는
근거를 가지고 있다.
중국 악양에서 발견된 고구려 사람 고자의 묘지명에 “고구려가 처음 선 때로부터 나라가 망할 때까지 708년이 되는데
30여대 대대로 공후로 되었다.(自高麗初立 至방破已來 七百八年 三十餘代)”라 적혀 있다. 이 묘지명에 따르면 고자의 선조는 주몽의 건국 사업에
공을 세워 건국후 자손들이 대대로 공후재상으로 되었는데, 고구려가 건국한 때로부터 망할 때까지 708년 동안 유지되었다고 하였다. 고구려가 망한
668년으로부터 708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기원전 40년이 되어 삼국사기의 기원전 37년과 겨우 3년 차이 밖에 없다. 고자가 고구려가
망한 후에 당나라에서 나서 거기에서 자랐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정도의 오차는 넘어가도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 일본서기 에 고구려
700년설이 전하고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의 고구려 존속연대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몽의 고구려국의 건국연도와
존속연대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5-2. 동명이 졸본부여를 건국한 시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주몽이 고구려를 건립한 과정에 대한 한 이설이 있다. 거기에 따르면 주몽이 졸본에 이르니 그곳에는 이미 졸본부여라는 나라가 있었고, 졸본부여
국왕은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보고 자기 딸을 아내로 주었으며, 졸본부여 국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하였다. 앞서 주몽보다 한 세대 앞서 활동했다고 확인한 동명의 졸본부여는 언제쯤 세워진 것일까.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5년(670년)조에는 문무왕이 고구려 왕자 안승을 고구려왕에 책봉하는 글이 있다.
태조 중모왕이 덕을 북산에 쌓고 공을
남해에 세워 위풍이 청구에 떨치고 어진 가르침이 현도에 미치고 자손은 서로 이어 끊임이 없었으니 나라의 강역은 천리에 뻗치고 나라의 년조는
팔백년이 가까왔다.
여기서 태조 중모왕이 고구려 시조인 주몽을 가리킨다고 보고, 장차 8백년이라 한 것은 주몽의 건국에서 멸망에
이르는 7백년이 조금 넘는 기간을 다소 과장되게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이가 있다. 그러나 7백년이 조금 넘는 기간을 8백년이라 한 것은 거의
100년이나 차이가 져서 이는 너무 지나치다. 또, 태조 중모왕의 “어진 가르침이 현도에 미쳤다”고 하여 중모왕과 현도의 관계를 들고 있는데,
이곳은 바로 한 현도군으로 주몽 때에는 아직 힘이 미치지 않았고 유리왕 33년에 가서야 되찾은 곳이다. 현도에 주몽의 어진 가르침이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문무왕비문에 “황룡을 맞아 주몽을 태우고”운운 하는 기사가 보이므로,그 무렵 고구려 시조를 <주몽>이라
하였지 <중모>라 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그럼 주몽 이전에 고구려를 세운 인물은 누구인가. 그 인물은 안승의 혈통이 주몽에
이어지므로 주몽과 혈연 관계가 있어야 한다. 양서에 “고구려 시조는 동명에서 나왔는데, 동명 후예가 따로 갈라져서 고구려 종족이
되었다”고 하였다. 태조 중모왕은 바로 양서의 동명을 가리킬 것이다. 아우러 양서의 기사는 “본지” 곧 ‘본 갈래 와 곁 갈래’가
끊이지 않았다는 책문의 기사와 같은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졸본부여는 곧 바로 고구려라 일컬을 수 있을까.
졸본부여를 세운
동명이 바로 고리국(고구려)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그렇게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졸본부여는 곧 고구려의 비롯함”이라 한 것은
아마 그런 뜻일 듯 하다. 그런데, 해동고승전 에서 기노기에 “고구려 시조 주몽이 고려 여인을 맞아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낳았다.”고 하여 졸본부여 사람인 소서노를 고려 여인이라 한 표현이 있다. 이런 점에서 졸본부여 또한 고구려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동명이 졸본부여를 건국한 시기는 고구려가 망한 670년에서 800년을 거슬러 올라가 기원전 132년경이 되는데, 이
시기는 앞서 우리가 백제 시조 비류-온조의 2세대 조상으로 확인한 도모 곧 동명이 활동한 시기일 가능성이 높다. 졸본부여는 기원전 130년
무렵에 세워졌을 것이다.
5-3. 고리국 건국 시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조에 “고려비기에서 말하기를
「구백년이 채 못되어 80세의 대장이 고구려를 멸하리라」 하였은즉 고씨는 한나라(기원전 206년-)때로부터 나라를 가져 지금(기원 667년)이
구백년이오 이적의 나이가 지금 팔십이니 고구려는 이 전쟁에서 멸망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당의 시어사 가언충이 당의 황제에게 올린
말인데, 이 가운데 우리의 눈길을 끄는 대목은 바로 ‘고씨가 나라를 세워 지금이 9백년’이라 한 대목이다. 고려비기의 내용대로 고구려
멸망년대 기원 667년에서 9백년을 거슬러 세어보면 기원전 232년으로 대략 기원전 3세기까지 올라간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마지막 사론에는 고구려가 “진한 때부터 중국의 동북쪽 모서리에 있었다.”고 하였다. 중국의 진나라(기원전 221년-기원전
206년)때부터 고구려가 중국의 동북쪽에 있었다는 것은 진나라가 기원전 222년에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이듬해에 제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중국을
통일한 때부터라는 뜻이다. 이 또한 앞에 본 연대와 비슷한 것이다.
김부식이 고구려본기 끝에 사론을 쓰면서 잘못 썼다고 보기 어렵다.
고구려가 주몽이 기원전 37년 건국하여 보장왕 때 멸망하기까지 705년간을 지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사론에서 고구려가 진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 것은 한 현도군 고구려현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 여겨진다. 고려비기의 기사는 오래동안 고구려 사람들 속에서 전해 내려온
전승에 기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근거로 우리는 고리국이 얼추 기원전 230년대에 세워졌다고 생각한다.
사기에
흉노열전에 기원전 284년 무렵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서쪽 땅 천여리를 빼앗기고 물러난 동호는 그뒤 다시 강성하여 졌다고 하였는데 그 시기는
진나라에서 장성을 쌓을 무렵이었다. 앞서 우리는 동호가 고리국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한 바 있는데 이러한 시기의 일치는 진나라 때에 동호가
강성해졌다는 기록이 고리국 건국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해준다.
5-4. 진번국 건국 시기
그러면
당회요의 고려비기 기사는 어떻게 볼 것인가.
고려비기에 “천 년이 못될 것이다”고 한 것에 따르면 고구려가 멸망한
기원 667년에서 9백년을 거슬러 따져보면 기원전 332년으로 대략 기원전 4세기까지 올라간다.
그런데 위략에 “옛 기자의 후손인
조선후는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연나라 스스로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여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호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공격하여 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여기 조선은 (기씨)조선을 말한다. 연나라는 소왕이 기원전 323년 칭왕하였고 이어 기원전
284년무렵에는 장수 진개가 (기씨)조선을 침략하여서쪽 지방 2천여 리를 빼앗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앞서 살펴 보았듯이 이 조선 속에는
진번(동호)이 포함되어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사기에는 진번과 조선은 나란히 거론되고 있다. 진번국도 조선과 비슷한 시기에 국가를 세웠을
것이다.
맹자에 맥국에 관한 기사가 있다. 맹자가 “무릇 맥에서는 오곡이 나지 않고 오직 기장만이 나오며, 그곳에는
성곽.궁실.종묘.제사의 예법 등이 없으며 제후가 바치는 폐백과 빈객에게 베푸는 잔치도 없고 백관과 관리도 없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
기사에서 우리는 맹자의 시대에는 맥족의 국가가 아직 없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산해경에는 맥족의 국가가
등장하는데,우리는 이를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침략을 받아 복속당한 진번국이라 추측한 바 있다. 아마도 당회요에 보이는 천 년설은
진번국(맥국)의 건국 연대를 알려주는 기사일 것이다.
그렇다면 맥족은 기원전 323년경에 진번국(맥국)을 세웠으나 기원전 284년 무렵
연 장수 진개의 침략을 받아 한때 망하였다가 얼마 뒤인 기원전 223년 무렵 재건하였으나 한초에 흉노 모돈에게 다시 멸망당하여 이후 위만에게
복속하였다고 여겨진다.
이상의 내용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나 라
건국자 건국 시기 멸망 시기 유국
연대
출 전
고 구 려 주몽 기원전 37년 기원 667년
705년설(700년설708년설) 삼국사기
고자 묘지명 일본서기
졸 본부 여 동명 기원전 130년대고구려로 계승됨 800년 설 삼국사기
고 리 국 ? 기원전 230년대 한나라 초기 900년 설 신당서
맥국(진번) ? 기원전 330년대기원전 284년경 1000년 설 당회요
6. 연노부와
계루부
6-1. 고구려의 5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고구려 초기에 5부를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없는데
연나부,제나부,환나부,관나부,비류부라는 5부의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이는 고구려 5부가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기 이전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구려 5부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으나 고구려의 오부는 처음부터 행정구역이라는 의견이 옳다고 생각한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부 이름과 중국 사서에 보이는 5부를 서로 비교 검토하여 둘 사이의 상관 관계를 살펴보고 비정하면 아래와 같다.
삼국사기 삼국지 후한서
양서
남사 일본서기
이현의 주석
掾那部 涓奴部 消奴部 消奴部 消奴部 西部(下部) 西部 右部
下部 提那部 絶奴部 絶奴部 絶奴部 絶奴部 (後部) 北部 後部
桓那部 順奴部 順奴部 愼奴部 愼奴部 東部(上部) 東部 左部
上部 靑部 貫那部 灌奴部 灌奴部 雚奴部 灌奴部 南部(前部)
南部
前部 赤部
沸流部 桂婁部
桂婁部 桂婁部
桂婁部 內部 黃部
삼국지 고구려전에 고구려는 “처음에는 연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연노부 세력이 차츰 미약해져서 지금에는 계루부에서 왕이 나오고 있다”고 했다. 고구려는 언제인가 연노부에서 계루부로 왕실이 교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2. 연노부에서 계루부로 왕실 교체
광개토왕비문이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왕위 계승 기사를 보면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후 왕통이 어떠한 커다란 변혁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계루부 왕실은 주몽 건국 이후의 왕실을 가리킨다고 보고 있다.
연노부에서 계루부로 왕실이 교체된 시기는 주몽의 고구려 건국을 전후한 시기일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 즉위조
협주에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는데 졸본부여 왕은 아들이 없었다. 주몽을 보고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자기 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는데 왕이
죽자 고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하여 졸본부여 왕이 통치한 나라를 고구려가 계승하였다고 하였는데, 주몽은 졸본부여 왕의 사위였으니 서로 혈연
관계가 없다. 고구려는 졸본부여를 계승하였으니 왕실이 교체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더욱이 졸본부여와 고구려는 비록 시가는 선후이지만 그 지역이
같으므로 이를 고구려 왕실이 연노부에서 계루부로 바뀌었다고 볼 수 없다.
졸본부여가 이미 고구려 건국 이전에 있었다는 것은 고구려 5부
중 계루부에서 이미 왕위를 세습하는 졸본부여란 나라가 있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주몽이 졸본 지역에서 고구려를
세우기 전에 이미 비류국이란 나라가 있었는데, 주몽은 건국한 후 가장 먼저 비류국을 정복하였다. 주몽이 비류국을 정복한 일이 바로 연노부와
계루부의 왕실 교체를 말한다 보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비류국은 고구려가 건국한 졸본 지역을 흐르는 비류수 상류에 있는 나라이니 또한 아주 다른
지역이 아니다. 비류국은 졸본 지역에 있는 한 소국이었다. 더구나 주몽은 비류국왕이 항복해 오자 그 나라를 다물도라 이름지었는데, ‘다물’은
고구려말로 ‘옛땅의 회복’을 뜻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송야의 비류국은 원래 고구려의 영토였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태어 났으므로 비류국은 주몽 선조가 살던 곳이었을 것이다. 주몽의 혈통은 이 비류국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주몽이 비류국을 정복한
일을 연노부에서 계루부로 고구려 왕실이 교체된 것으로 볼 수 없다.
게다가 이 비류국이란 이름은 비류수 상류에 있어 얻은 것으로, 비류부란
이름이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곳도 비류수 지역이었다. 이후 유리왕은 비류국왕의 딸이었던 송씨를 왕후로 맞는데, 그 아들
대무신왕은 고구려 3대왕이 되었다. 이처럼 비류부는 고구려 주몽 왕실에게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그렇다면 비류부는 바로 계루부일 것이다.
그러면 연노부는 어느 곳에 있었는가.
앞서 우리는 주몽 이전 기원 2세기경에 이미 고구려가 중국 사서에 보이는 것을 알았다. 이
고구려가 바로 계루부에게 왕위를 넘긴 연노부와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5부는 행정구역이니, 서부 연노부는 계루부 서쪽 지역에
있었다. 연노부는 바로 한 현도군 고구려현 지역일 것이다.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조에 “고구려는 한나라 때에 현도군에서 고취기인을
하사받고 조복의책을 받았는데 현도군의 고구려현의 현령이 그 명적을 주관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앞의 고구려는 주몽의 고구려(졸본부여를
포함해서)라고 볼 것이다. 이 글은 (현도군의 수현이 된) 고구려현이 (동명의 졸본부여나 주몽의) 고구려와 교류를 주관하는 등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다는 뜻으로 보아, 이 고구려현 지역이 한과의 관계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고구려의 지배 세력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 세력이 바로 고구려의 본디 5부 가운데 연노부의 중심 세력이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위 기사에 이어 “고구려가 후에 점점 교만해져서
현도군에 나오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차츰 교만해진 것이 고구려현의 세력이라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들 세력은 바로 주몽의 계루부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간 고구려를 가리킬 것이다. 이처럼 현도군 지역이 한 군현 중에서도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점에서도 이곳이 고구려 전왕실
연노부가 있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가 주몽의 계루부의 역사만 싣고 있는 데 비해서 중국 문헌인 삼국지는 연노부
왕실의 고구려까지도 주몽의 고구려와 별 구분없이 함께 고구려로 이해하고 있다. 연노부의 고구려에 대해서 현도군 고구려현 사람들을 통하여 알게
되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한서 지리지에 나타난 현도군의 호구수를 인근 군현의 호구수와 비교하여
보자.
속현수호구수인구수1현당 호구수1현당 인구수 현도군 345,006221,84515,00273,948
낙랑군2562,812406,748 2,51216,269 요동군1855,972272,539 3,10915,141 요서군1472,654352,325
5,18925,166
현도군의 1현당 호구수는 낙랑군의 5.97배,요동군의 4.83배,요서군의 2.89배에 이른다. 1현당 인구수는
낙랑군의 4.55배,요동군의 4.88배,요서군의 2.94배에 이른다. 현도군이 인근 군에 비해서 1현당 호구나 인구가이처럼 비정상으로 많은 것은
이곳이 본래 토착사회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그 토착사회란 바로 고구려의 5부 가운데 이곳에 있었던 연노부를 말하는 것이다.
현도군 지역이
고구려 5부 중에서 연노부임은 다음 사실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첫째, 고구려 대무신왕은 5년 부여왕 종제가 만여 사람을 끌고 와서
항복하자 이 부여왕 종제를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에 안치시켰다. 고구려본기에서 “왕봉위왕”이란 특이한 기사는 오직 이 기사 하나 뿐이다.이와
비슷한 기사는 송양의 비류국을 다물도라 하고 송양을 ‘주’로 봉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이 ‘다물도주’를 ‘다물후’라고 일컫기도 하였는데, 이는
고구려의 통치제도가 행정 구역으로 5부를 두고 각 부에는 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모용선비의 침략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운 고밀에게
‘왕’이란 봉작을 내리려 하였으나 세 번이나 사양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데서 뒷받침된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연나부는
삼국지에 연노부라 한 부이다. 어째서 고구려에 투항하여 온 부여 왕족을 ‘연노부(연나부)’에 안치한 것일까. 이 지역이 동명의 후손인
고구려 부여 왕실의 고향이기 때문에 그곳에 왕으로 봉하고 안치하였으리라 짐작한다.
둘째,현도군이 수행한 임무를 통해서 더욱 뒷받침할 수
있다.
삼국지 부여전에는 현도군과 관련 있는 기사가 있다.
“한나라 때에 부여왕의 장례에 옥갑을 이용하였는데, 언제나 옥갑을
현도군에 미리 갖다 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그것을 가져다가 장사지냈다.”
부여에서 자기네 왕의 장례에 쓸 옥갑을 현도군에 미리 갖다 둔 것은
그곳이 조상 곧 동명이 태어난 곳이란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삼국지 부여전에 “ 부여는 본래 현토군에 속하였다. 한나라 말년에
공손도가 해동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외이들을 위력으로 복속시키자, 부여왕 위구대는 소속을 바꾸어 요동군에 복속하였다.”고 하였다. 부여왕 위구대는
수서와 북사에 “구대는 부여 동명의 후손이다” 라고 한 ‘위구대’와 동일 인물이거나 위구대의 후손이다. “부여가 본래 현도군에
속하였다.”는 말은 현도군이 부여 왕실의 선조의 고향이란 말일 것이다.
현도군 고구려현이 고구려 행정구역인 연노부 지역임은 고구려국과의
관계에서도 입증된다. 한서 왕망전에 호를 치기 위해 강제 동원됐던 고구려 병사들이 반발하여 새외로 이탈한 사건의 책임을 따져 ‘고구려후
추’를 유인해 죽였다고 했다. 이 사건에 대해 삼국사기 유리왕 31년조에서는 이때 죽은 이가 ‘아장연비’라 하였다. 중국에서는 현도군의
고구려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고구려후’라 하였는데 ‘후’는 어디까지나 한에서 임명한 작위일 따름이고 , 고구려에서는 ‘우리 장수’ 곧 ‘고구려
장수’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고구려에서 고구려현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구려는 중국 군현
가운데 현도군을 가장 먼저 침공하였다. 유리왕 33년(기원후 14년) 현도군 고구려현을 한나라로부터 빼앗아 선조의 땅을 되찾았다. 이어서 기원후
30년 낙랑군의 동쪽 7개 현을 되찾은 다음 이를 발판으로 기원후 49년 고구려는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역사에서
숱하게 등장하는 요동군 서안평현 공략은 이 현도군 지역 다시 말해 고구려 부여의 조상이 살던 땅을 되찾으려는 노력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3. 맺음말
이상에서 우리는 동명신화와 주몽신화를 신화 요소에 따라 분석하여 이 두 신화가 별개의 신화임을
확인하였고, 그 바탕 위에서 동명 신화에 나오는 몇 가지 역사 요인에 대해서 문헌으로 검토하여 보았다. 이 논의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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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동명 신화가 주몽 신화로 변모하여 고구려 사람들에게
바다들여졌을까.
이주자들에 의해 이 신화는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갔으며 사람들의 이동에 따라 전해 내려가 그들이 정착한 곳에
다시 붙여졌을 것이다.
첫째,感情이 출산 동기가 되는 점에서 같다.
비록 동명신화는 異氣感情이요, 주몽신화는
日光感情에 의한 것으로 두 신화가 異氣와 日光의 차이는 있지만 感情이 출산의 동기가 된다는 점에서 닮았다.
중국의 감정
신화
(논형의 후직,-주의 시조 후직설화;사기 주본기,
* 포희는 그 어미 화서가 큰 발자국을 밟고 낳았다 하며, 염제
신농씨는 그 어미 여등이 신룡에 감응해서 낳았고, 황제는 어머니 부보가 북두칠성에 감정해서 낳았다. 위 삼황 뿐만 아니라 오제 중에서 소호가
그렇고, 우제나 후직 등의 탄생 설화가 모두 감정 요소를 가진다.
오손왕 곤막-사기 대완열전,
난생신화는 크게
네 갈래가 있다.
① 가장 소박한 것으로 단순히 卵이라 하여 여인이 출산하지 않고 卵에서 바로 직접으로 인간 또는 신이 출생하는 것.
박혁거세신화 김수로왕신화가 그렇다.
② 다음으로 소박한 것으로 단순히 여인이 알을 낳고 그 속에서 아이가 나오는 것
산해경
大荒經에 “有卵民之國 其民皆生卵 卽卵生也”
* 회이 서언왕 설화
장화의 박물지 권 7,異聞조에 「徐偃王志云 徐君之宮人 娠而生卵
以爲不祥 棄於水濱 孤獨母有犬 名鵠倉 持所棄卵 銜而歸母 母覆暖之 遂成小兒 生而偃」서왕 언이 직접 알에서 나옴
<후한서>에 “
博物志曰 徐君宮人 娠而生卵 以爲不祥 棄於水濱 孤獨母有犬 名鵠倉 持所棄卵 銜而歸母 母覆煖之 遂成小兒 生而偃 故以爲名 宮人聞之 乃更錄取 長襲爲徐君
尸子曰偃王有筋而無骨 故曰偃也”
述異記에도 「彭城郡古徐國也 昔徐君宮人生一大卵 棄於野 徐有犬名后倉 啣歸溫之 卵開內有一兒」라 하였다.
주나라 康王(1078-1053) 시대 회수 지역의 일이라고 한다.
③ 日影의 빛을 받는 것
④ 鳥가 떨어뜨린 卵을
呑하는 것
* 은 시조 설(契)의 출생 신화
<사기.은 본기>에 「殷契 母日簡狄 有계氏女 爲帝곡次妃 三人行浴 見玄鳥墮其卵
簡狄取之呑 因孕而生契」 그 어미가 제비의 알을 먹고 설을 낳았다.
이러한 고대 한족의 탄란회잉설화는 우리나라의 난생신화와 구상이 다소
다르다. 그러나 이 설화는 원래부터 전승되어 오던 한족 고유의 것이 아니라 동이계설화에서 암시를 얻어서 된 것이라 한다.[森三樹三郞
支那古代神話(일문) 144쪽;이재수 29쪽에서 다시 인용]
중국의 감정형 신화는 버림을 받지 않는다.
기아 화소는 통과의례의
하나이다. 사람이 알을 낳았으니 상서롭지 않다 하여 버렸다가 축수나 금조가 거둠을 보고 신성함을 알게 되어 다시 거두어 길렀다는 고난 요소는
탈해왕 신화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이웃 중국의 설화에도 나타난다. 탈해신화에서는 사람으로서 알을 낳는 것이 고금에 없는 일이라 하여 궤에 넣어
바다에 띄웠다. 서언왕은 수빈에 버림을 받았다.
* 선비의 단석괴의 어머니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우박을 먹은 다음에 그를
잉태하였다.<삼국지>30 선비전
그러나 동명신화에는 어미가 알을 먹고 낳았다는 신화의 영향을 받고 있다.
<주석:고구려 신라 가야 건국신화에는 시조가 알을 깨고 나온다.>
주몽이 알을 깨고 나왔다고 한 것은 원시시대에 새를
토템으로 하던 오랜 신앙이 그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 것이다.[조선전사 3권 19쪽]
<주석: “낮잠을 자고 있는 처녀의
음부에 빛이 비쳐서 잉태하여 이를 낳으니 나니와의히메고소 신사의 아가루히메신이 되었다.”는 일본신화는 이에서 갈라져 나간 신화라
하겠다.>
동명 신화에 보이는 이 ‘雞子’라는 모티프는 신라 ‘鷄林’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삼국유사1 기이2 고구려조에 국사「고려본기」를 인용하고 있는데 거기에 주몽의 「本姓解也」라고 되어
있다.
** 삼국지 위지 부여전에 인용된 위략의 글은 구지에서 또 인용한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구지가
어떤 책인지 알 수 없으나 시기로 보아서 앞선 논형을 우선 위략의 편자인 어환은 보고 그것을 인용하였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왕충은 후한의 광무제 건무 3년(기원 27년)에 낳아서 화제 영화 중(기원 89-104)에 죽었다 하니 왕충이 본 부여의 시조 신화
기록의 편찬 연대는 후한초를 내리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건국 신화가 부여 사람들 사이에 있었던 것은 전한 또는 그 이전서부터
있었다고 볼 것이다.
논형의 동명신화가 어떠한 자료에 의거해서 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논형이 저술된 시대는
한사군이 설치된 이후이므로 위씨조선에 걸쳐 왕래한 漢人의 손으로 전래된 자료에 의거한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김정학 <조선신화의 과학적
고찰> 史海 창간호]
이는 주몽이 동명의 후지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몽을 <동명왕>이라 시호한 것도 꼽을
수 있다. 때문에 주몽은 비류국을 정복하고 나서 이곳을 다물도라고 불렀던 것이다. 고구려 5부 가운데 계루부를 비류부에 비정하였는데 주몽이
비류국을 ‘다물도’(고향 땅)이라 한 것에서 비류부가 계루부임이 더욱 확실하여 진다.
주몽이 졸본부여를 정복하여 고구려를 세운 것이
아니라는 점은 백제 기록에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중국 문헌에 <홀승골성> <홀두골성>이 보이는데
<승>과 <두>는 <본>을 잘못 쓴 것으로 본다. <홀본곡>이 본디 표기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두 신화를 부여족의 분열과 이동이라는 역사 상황에 입각하여 동일한 구조를 지닌 동명신화와 주몽신화가 확산되어 나타나는 재생성 현상으로 본
의견을 귀여겨 들을 필요가 있을 듯하다.
르는데, 바다에 들자면 두 개의 군을 지나 2,100리를 가야 한다.”고
하였다.
한편 요사 지리지에 보면 “상경 임황부는 본디 한 요동군 서안평의 땅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요동군 서안평현은 지금의 난하
상류에 자리했던 임황임을 알 수 있다.
소수는 요동군 서안평현의 북쪽을 흐르는 강이니 이곳은 산해경에서 맥국이 연나라에
가까웠다는 기사와 일치한다.
이 맥국의 위치를 어디로 볼 것인가. 우선 이 기사에 보이는 대택은 안고리뇨(安固里淖:Anguli nor)
근처 하북 지방의 장북(張北)현 서쪽에 있고 동호는 장가구(張家口)와 난하 사이의 산악 지대에 살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럼 한수는 어느
강인가. 한수는 연의 동쪽에 있다고 여겨지는데 연의 동쪽에는 한수라는 이름을 가진 강이 없다. 그런데 비슷한 이름의 한수(汗水)라는 강이 있다
한문에서 ‘漢’자와 ‘汗’자는 발음이 같아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다고 본다. 산해경의 ‘한수’는 수경주의 ‘한수’로 보아도 될
것이다. 이 유수는 오늘의 난하의 옛 명칭이므로, 한수는 유수(현 난하)의 지류일 것이다. 수경주의 한수는 현 난하의 상류라고
한다.
사기집해는 이어 「遼東有番汗縣」이라 하여 진번이 요동군 번한현과 관계있는 곳으로 풀이하고
있다.
한서 지리지 번한현에 「徐廣云 遼東郡 有番汗縣古城 疑卽眞番也」이라 하여 요동군 안의 번한현 고성이 옛 진번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다. 番汗과 眞番에서 같은 番을 쓰고 있는데, 이는 이 두 이름이 하나의 나?/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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