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은 진실이다. 그것은 제공자이고 당신의 미래이다, 당신이 말로 표현할 때, 그것이 실재한다는 것을 알라!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다. 당신이 입법자이며, 당신이 알고 말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그렇게 실재하게 된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유일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당신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또한 당신이 구하는 모든 것을 가져도 된다. 지금의 앎으로는, 아직 이것이 진실이라고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앎은 이러한 깨달음에 이르는 문을 열어 준다. 그 깨달음은 생각이 현실로 발현되도록 뇌의 또 다른 부위를 활성화한다. 그리하여, 무한한 생각을 실제로 경험하고 나면, 앎이 과업을 행한다는 깨달음이 뇌의 에고 부위에 기억된다. 이러한 깨달음은 더 무한한 생각에까지 나아갈 수 있는 힘을 당신에게 준다.
길게 말하지 않고 몇 마디로 줄여 말한다면, 이러하다. “나는 이제 안다. 나는 절대적이다. 나는 완전하다. 나는 하느님이다. 나는 유아독존이다.” 다른 말이 필요 없이 이 말들만 있다면, 당신은 더 이상 이 세상에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가정하거나 믿는 것보다 아는 것이 얼마나 더 위대한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라는 것보다 더 많이 아는 것이 얼마나 더 위대한가? 알지 못하는 것보다 아는 것이 얼마나 더 위대한가? 아는 데는 모르는 데 드는 것과 동일한 사고작용과 에너지, 얼굴 표정과 몸짓을 필요로 한다.
알라! 그저 알라! “나는 이것이 일어날 것을 안다.” “나는 내가 하느님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행복하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가 존재하는 것을 안다.” 이렇게 알고, 알고, 또 알라! 그것이 전부이다. 항상 알라. 만약에 당신은 그렇지 않다거나 그럴 수 없다고 한다면, 당신은 결코 모를 것이다. 지금 안다고 말하라. 그러면 당신은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과 나의 차이점을 당신은 아는가? 나는 내가 무한한 신(神)임을 알고, 당신은 모른다! 그것이 유일한 차이다. 다시 말해, 나는 내가 그렇다는 것을 알지만, 당신은 아직도 당신이 무한한 신임을 깨달아야만 한다. 당신의 사회는 당신이 무한한 신이 아니라고 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아는가? 그들은 날마다 스스로를 잊어버린다.
왜 당신은 당신의 앎을 방해해 왔는가? 그 이유는 물질이라는 형상으로 생각을 이해하려고 애쓰다보니, 당신의 사고작용은 물질 현실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삶에 대한 당신의 전체적인 이해를 당신 스스로 변형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당신도 알다시피, 물질이란 생각을 극단적인 범위까지 변형시킴으로써 만들어지는 생각의 한 단계이다. 생각을 빛으로, 빛에서 전기단위로 낮추고, 그러고 나서 전기단위를 양의 전하와 음의 전하를 띠는 부분으로 나눔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물질 형상 안에서 하느님과 연결될 때마다, 당신은 생각을 원래 모습인 순수와 나누어지지 않은 있음으로서가 아니라, 나눔과 대립으로 인식하고 이해하고 있다. 당신이 물질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생존에 치일수록, 당신은 점점 더 상반되는 차원의 용어들을 가지고 삶을 보게 된다. 위/아래/, 가까이/멀리, 빨리/천천히, 밝은/ 어두운, 큰/작은, 뜨거운/차가운, 좋은/나쁜, 긍정적인/부정적인 같은.
순수 생각의 있음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당신은 변형된 에고 - 물질적 삶과 생존에 치우쳐 있는 뇌의 추론 부위 - 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변형된 에고는 시간과 거리, 분리라는 환영에 따라 인식하는 그것이다. 생존과 세상으로부터의 인정이라는 견지에서 인식하는 그것이다. 순수 생각을 분열하고 심판하는 바로 그것이다. 순수한 생각은 당신들 누구에게나 떠오를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은 재빨리 그것이 당신에게 옳은지 그른지,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현실적인지 비현실적인지, 합리적인지 비합리적인지를 분별한다. 자신의 생각을 판단하여 긍정이나 부정으로 나누어 놓을 때마다, 당신은 그것을 낮은 진동률의 가치로 변형시켜 버린 셈이 되었다. 앎은 그 어느 것도 판단하지 않는다. 곰곰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생각이 진실하고 정확하다! 앎은 생각의 무게를 달아보거나 가치를 따지지 않는다. 앎은 생각이 있음이기를 허용한다. 당신의 사고작용이 중단되거나 방해받지 않도록 허용한다.
다른 세상을 보거나, 더 섬세한 소리를 듣거나, 몸이 가벼워지기 위해서,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여러 가지 현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앎이 몸에서 경험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당신이 해야 할 전부이다. 여러 가지 현실이 실재한다고 믿지 않는다면, ‘믿지 않음’은 당신의 뇌가 더 위대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는 하나의 판단이다. 그러므로 매순간 영성을 통하여 들어오는 모든 앎은 뇌에서 퉁겨져 하느님 마음으로 되돌려진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당신을 이 지상에 안전하게 묶어 두고 제한하는 것만을 받아들이게 된다.
당신 존재의 주-하느님으로부터, 당신이 무한한 앎을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모든 생각이 판단에 따라 변형되지 않은 채 당신의 두뇌 의식으로 들어와서, 당신의 몸이 그 생각들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도록 허용하여야 한다. 변형된 에고 - 그것은 당신의 욕구를 신뢰한다 - 가 허용하는 의식을 통하여 뇌하수체는 뇌의 다른 부위를 활성화하여, 무한한 이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다. 당신이 원하고 있을 때, 무엇이 ‘문득’ 당신으로 하여금 창조적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 주는가? 당신은 단지 그것이 당신의 앎 속으로 들어오도록 해 주는가? 당신은 단지 그것이 당신의 앎 속으로 들어오도록 허용하였을 따름이다. 당신이 한 것은 그것이 전부이다. 창조적 생각은 늘 거기에 있었다. 당신이 찾아 주기를, 그래서 당신의 수신체로 들어오는 것을 당신이 허용하기를 기다리며. 필요한 것은 이것이다. 사고작용이 판단과 변형된 생각에 얽매이는 것이 덜할수록, 초의식의 생각들은 당신의 뇌 수신체로 들어오는 것이 쉬워진다.
당신 자신과 생명의 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배우라. 꽃을 볼 때,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꽃에 대한 생각을 변형하는 판단이다. 순수한 것은 ‘꽃’이라는 생각이다. 당신이 꽃을 쳐다보면서 그것을 ‘꽃, 빛, 생명, 있음으로 볼 때, 당신은 당신 자신으로 하여금 생각의 순수함과 있음을 받아들이도록 허용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당신의 몸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높은 진동률의 전기단위를 보낸다. 그러고 나면, 당신은 그리스도가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모든 것을 동등함과 있음으로 보기 때문이다. 당신의 경험을 제한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을 때마다, 당신은 일상의 범위를 벗어나는 무한한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당신의 뇌를 활성화한다.
당신이 받아들이는 생각을 결코 판단하지 말라. 무언가를 긍정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부정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서 어떻게 긍정적일 수 있겠는가? 만약에 당신이 ‘이건 좋아’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다른 무언가는 나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 자신을 다독거리고, 당신 자신을 사랑할 때는, 당신이 아름답다거나 사랑스럽다고 말하지 말라. 당신은 하느님이다라고 말하라. 당신의 이웃과 더불어 어떤 일을 행할 때에도, 그것이 선하다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하느님이다라고 말하라. 그 말은 그것의 본질을 의미한다. 단순히 그것은 순수하고 고결한 삶의 경험임을 의미한다.
다른 실체들이 그들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것을 당신이 볼 때에, 그들은 있음 이외에 그 어떤 것으로도 보지 말라. 그들의 표현을 좋다거나 나쁘다,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라고 판단한다면, 당신은 변형된 것에 대한 인식을 당신 안에 만들어 낸다. 당신이 인지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당신은 그렇게 된다. 왜냐하면 그 생각이 당신 존재 안에 하나의 느낌으로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아니라 당신이 당신 판단의 결과를 경험하기 때문에, 당신이 당신 스스로를 희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영혼에 기록된 그러한 느낌은 앞으로 계속해서 당신 자신의 행동과 당신 자신의 존재를 판단하는 하나의 전례로 자리잡게 된다.
어떤 일로 누군가를 비난한다면, 그들에게서 보이는 당신의 면면을 비난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그런 점들을 찾아내기가 쉬웠던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관심이 그러한 면면으로 쏠린 것이다. 다른 실체는 단지 당신 내면을 판단하는 거울이자, 당신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았던 당신에 대한 판단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역할을 했을 뿐이다. 다른 이들을 볼 때에, 그들을 있음으로서 보라. 그리고 소위 말하는 ‘있는 그대로’ 보라. 그들이 남들에게 잔혹하거나 가증스럽게 대하고 있다면, 그들을 잔혹하고 가증스럽다고 말하는 것도 진실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태도가 그들이 진정으로 표현하고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들 나름대로 있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표현에 대해 그들이 나쁘다,옳지 않다, 사악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판단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경험이다. 변형인 것이다.
아무도 판단을 할 자격이 없다. 피부색도, 행동도, 다른 그 무엇도 당신을 있음의 상태, 하느님의 지위에서 변형시킬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들이 누구이든, 그들이 어떻게 표현하고 있든, 그들을 사랑하라. 왜냐하면 그들 내면에 있는 하느님이 그렇게 하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저 그들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사랑 받게 되어 있다. 그들이 실재한다는 사실은 미래에 그들이 행할 그 무엇보다도 위대한 것이다. 그들이 존재하므로, 그들이 존재하는 한 당신도 존재할 것이 분명하므로, 그들을 사랑하라. 그들이 누구인지 개의치 않고 그들을 사랑한다면, 그리고 그 사랑이 지속되도록 한다면, 당신은 항상 순수한 존재가 될 것이다.
이제 당신의 사고작용에서 판단을 제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인가? 당신의 느낌들과 그 느낌을 낳는 생각들을 인식하는 것이다. 단순히 그러한 것들을 인식함으로써, 당신은 더욱 정제된 상태에서 생각할 수 있도록 자신을 가르칠 것이다. 불행이나 슬픔, 분노, 두려움, 조급함, 외로움 - 그 밖에 좋지 않은 느낌들 - 을 느낄 때는, 당신의 생각을 살펴 보라. 당신은 곧 당신의 변형된 생각 - 당신이나 남을 판단하고, 외양이나 크기로만 생명을 보는 - 과 당신의 불쾌한 감정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점점 당신이 이러한 느낌들에 싫증을 냄에 따라, 당신은 생명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던 판단을 제거하기 위하여 당신의 생각을 정제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그리고 더 무한한 생각이 당신 존재 안에서 경험될 수 있도록 허용함에 따라, 당신의 무한한 생각과 평화, 기쁨, 조화, 가뿐한 몸놀림 등, 이러한 느낌 사이의 연관성을 발견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결코 판단하지 말라! 스스로에게 연민을 느끼고, 단지 당신에게 가르침을 줄 당신의 생각과 느낌들을 인식하도록 허용하라. 왜냐하면, 확신하건대, 그것들은 그러할 것이므로.
창조된 그 모든 단어 중에, 이러한 가르침에 가장 잘 부합되는 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존재’라고 하는 것이다. 존재!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당신이 어떠하든지 당신 자신을 허용하고 그런 자신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느끼고 있는 그대로 느끼고 그 감성에 따라 사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이 존재하는 전부임을 알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은 그 순간에 완전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는 것이다. 당신의 영혼이 당신에게 추구하기를 재촉하는 모험을 겪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존재의 이유는 무엇인가? 존재하는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당신은 결코 자신이나 남, 혹은 당신에게 떠오르는 생각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옳고 그름도 없고, 가능 불가능도 없으며, 완전함이나 불완전함, 긍정이나 부정도 없다. 지금 순간의 아름다움을 느끼지도 즐기지도 못하게 하는 시간이라는 환영은 더 이상 없다. 당신이 존재의 상태에 있을 때, 생명의 있음과 이 순간의 연속만이 있을 뿐이다. 존재의 상태에서는, 과거나 미래에도 당신의 생각이 더 이상 죄의식이나 후회, 의무감이나 도리에 얽매여서 우물쭈물하지 않는다. 존재함으로써, 당신은 어떤 특정한 진실을 고집하지 않고, 모든 진실을 수용한다. 당신은 모든 진실을 있음으로 간주하고, 당신 존재의 상태에 적용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각각의 진실을 탐구해 나간다. 그렇게 살아갈 때, 당신의 뇌를 통하여 당신에게 들어오는 모든 생각을 다 숙고해 보고, 당신의 몸에서 느낌으로 이해한다 - 이렇게 함으로써 더 많은 앎, 더 많은 생각, 더 많은 있음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
단순히 존재할 때, 당신은 모든 것의 있음과 조화를 이룬다. 그러한 조화를 통하여, 당신이 원하는 어떤 것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은 존재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 당신 존재의 하느님이 당신이 생각하는 것,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당신에게로 끌어올 것이다. 또한 그것이 다가올 것이다. 외향적인 신념을 실행해 보느라고 바쁜 사람들은 내면적인 것을 비웃는다. 있음으로서, 당신은 이미 모든 것을 가졌고 모든 것이기도 하다. 단순히 존재하고, 그리고 모든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허용할 때, 당신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때에는 당신이 그토록 알고자 했던 그 모든 것을 눈 깜짝할 사이에 알게 될 것이다. 당신 생각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이 당신 영혼 속에서 감성으로 발현될 수 있도록 허용할 때, 당신은 무한한 신으로서 살아갈 것이다 - 단지 있음과 존재하는 모든 것을 향하여 열려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 자신의 하느님 본성으로의 순수한 통로가 되며, 당신은 순수한 하느님 마음의 단순함에 더 가까워진다.
알아 가며 허용하면서 사는 법을 배우라. 그러면 당신은 변형된 에고를 지배하게 된다. 그때 당신은 일곱 번째 수준, 일곱 번째 막, 일곱 번째 천국을 지배하게 된다. 이 일곱 번째에는 판단이라는 것이 없다. 오직 생명의 지속적인 있음만이 있다. 일단 판단을 지배하게 되면, 당신은 이 세상 전체를 지배하게 되고, 원하는 때에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람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경험의 가치(1) (0) | 2014.09.13 |
---|---|
[스크랩] 마음 열기(4) (0) | 2014.09.13 |
[스크랩] 마음 열기(2) (0) | 2014.09.13 |
[스크랩] 마음 열기(1) (0) | 2014.09.13 |
[스크랩] 닫힌 마음 (0) | 2014.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