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rs
연인들
이제 그 다음은 무엇인가?
글쎄.
아무도 어른은 아니다.
여기에 그 다음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애인을 두고 있는 사람이 몇인가?
손을 들어보시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애인이 무엇인가?
애인이 많으면 그건 환란이지!
애인이란 우리 자신이 같이 잠자리에 들고 그 다음날은 후회하도록 허용한 친구이다.
애인은 당신이 누군가에게 느끼는 사랑을 모두 합쳐 그 전체를 한 개인으로 구체화시킨 대상이다.
애인은 당신의 부모, 당신의 자식, 당신의 형제자매,
당신의 친구, 당신의 적에게 느끼는 사랑을 대표한다.
그래서 애인에게 빠지게 되는 것이다.
삶의 주변에 있는 모든 이가 한 대상으로 모여진 것이다.
그것이 그저 하루 밤만에 그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 한 밤에 그 모든 사랑이 모여지는 것이다.
내가 일으키는 바람을 이제 이해하겠는가?
애인은 당신이 잠자리를 같이 하도록 허용한 친구이고, 육신을 같이 나누는 친구이다.
불행하게도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애인을 그저 필요한 관계로서, 필요로서 인식할 따름이다.
사람은 관계가 필요하다. 성적인 충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충족은 부모로서 모자란 충족이고, 모자란 우정이고, 모자란 위험이자 적인 것이다.
이 모두가 하나로 묶여지는 것이다.
그 애인은 모두 당신의 삶에 중요한 사람들이다.
애인은 완전한 하나로 합쳐지도록 허용한다.
양극이 완전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정자와 난자를 나누고, 타액을 나누고, 잠자리를 같이 하고,
모든 것에서 완전한 하나를 이룩해내는 것이다.
그것으로 하느님의 완전한 형상, 완전한 마음을 다듬어 낸다.
애인에게 우리의 부모가 있고, 어머니가 있고, 아버지가 있다.
형제가 있고, 자매가 있고, 친구와 적, 막역한 관계가 있다.
이 모두를 가지게 된다. 이것을 어느 만큼 이해했는가?
이런 것들을 이해할 때 애인은 진정한 포상이다.
궁극적으로 그들이 우리가 가슴에 품고 있는 모든 것을 실체화시킨다.
연인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할 때, 그들은 주는 것으로 사랑을 시작한다.
우리 부모에게 주는 것, 친구에게 주는 것, 그 모두를 그들에게 준다.
그 반대급부로 꼭 같은 것이 돌아오기 때문에 우리는 흥분되는 것이다.
에너지가 서로의 사이에 왕래가 한다는 것이다. 문자그대로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최면적이다. 황홀함에 빠진다.
자신의 인생에서 맛보게될 가장 취하는 경험이 된다.
그 순간에 당신은 완전한 하느님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몇인가?
마술이다.
애인을 사랑할 때, 당신이 그 애인에게 다가가면서
아이들에게서처럼 그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접근하지 않는다.
환상이 지나가자마자 당신은 그 애인을 당신의 부모로 간주하지 못한다.
필요가 다가오면 마술은 떠나간다. 왜 그렇게 되는가?
필요가 시작되면, 관계는 깨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완전하고 일방적으로 주던 경험은 그치게 된다.
여기서 한 사람은 주고 한 사람은 받는 쪽에 있게 되면서
금이 간 관계만이 경험될 뿐이다.
이해하겠는가?
그리고 과도한 보상을 가지게 된다.
주는데 더 많이 주는 사람과 받는데 더 많이 받는 사람이 된다.
이런 소리가 익숙하게 들리겠지? 갑자기 애인은 부모로서 탈바꿈하기 때문이다.
애인은 친구로 바뀌고, 애인은 아이들로 바뀐다.
알겠는가?
그리고 마술은 거기에서 그친다.
애인을 갖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마음과 육체, 영적 수준에서 경험하는 마술은 절대적으로 전체임을 이해해야한다.
하느님은 그 모든 수준에서 표현되어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중독성이 있는 이유이다.
그것이 당신이 항상 느껴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을 애인 때문에 느껴지는 것으로만 안다.
그 상황, 그 순간은 당신이 갖게된다 해도 매우 짧은 순간이다.
하느님의 자식인 당신은 공인된 포획자이고 노예훈련사이다.
당신은 폭군이다. 당신은 서로 노예화한다. 당신은 압제를 가한다.
당신은 이제 애인이란 희생자를 가지게 되고 당신은 폭군이 된다.
그리고 그 역할을 주고받는다. 그 황홀했던 순간은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의 위대한 순간이고 모두를 주는 그런 순간인 것이다.
그것은 무조건적이어야만 했다.
어린아이로서 당신은,
하느님이 되는 것에 중독이 된 채로 지내는 삶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당신은 성 프란시스가 살았던 삶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그는 생명의 모든 것을, 모든 형태를, 아침이슬을, 푸른 새의 날개 깃을 사랑했다.
돌덩어리를 사랑하고 겸손한 모든 것들을 사랑했다.
모든 생명이 그의 사랑이었다.
당신은 그런 느낌을 세분하고, 다른 누군가의 책임으로 돌려놓는다.
그리고 나서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한다.
절대 하지 말아야되는 마술을 유지하기 위해서 매우 열심이다.
그것은 그대로 흘러가야 되는 것이거늘.
그 사랑이 흘러 갈 때, 그것은 강물처럼 흐른다.
그것은 중독되는 것이고 달콤하며 모든 수준에서 충족을 가져온다.
좇으려고 하면 그것을 잃게된다.
왜냐하면 그때 당신은 필요를 느끼게되고 부족함을 느끼고
충족의 짐을 다른 사람에게 지운다.
자신을 충족시키는 자신이 되는 것보다 그렇게 해 버린다.
이해하였는가?
애인은 적이 될 수가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신의 가장 큰 적이 한 때 당신의 애인이었던 이가 아니던가?
그들은 당신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신의 안에 있었고 당신의 바깥에 있어 보았다.
당신은 그들에게 노출되어있다.
그래서 그들을 계속 사랑하는 것보다 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애인은 항상 깨어지기 쉬운 위험한 관계이다.
그 느낌을 서로 같이 지속시키는 마술은 삶의 모든 수준에 적용되어야한다.
만약 이렇게 얘기한다면,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한다. 이 사람을 사랑한다. 이 사람에게 사랑을 주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나에게 아무 것도 되돌려주지 않는다.”고 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이렇게 되묻겠다.
오랫동안 채워주었던 것, 그 오랜 세월을 계속 줄 수 있었던 것을 제외하고 나서도
당신자체로서 충분히 갖고 있지 않는가?
사랑이라는 것이 영원히 지속하는 것이 아니던가?
얼마만큼만 줄 수 있는가? 영원한 것이다!
왜 그것이 어느 순간에 중단되어야 하는가?
다른 이가 왜 당신에게 화답을 해야되는가?
당신은 그들로 하여금 화답하도록 만들어야 하는가?
그 순간이야말로 마술의 순간이다.
마술이 거기에 없다고 그 사랑은 정지하는가?
그러면 안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고 있다.
관계라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조건적으로 되어가기 때문이다.
나는 하느님이 태양의 형태로 장미와 열애를 하는 것에서 그것을 본다.
태양은 식물의 푸른 봉오리를 따듯하게 한다.
빛이 보내주는 따듯함에 의해, 봉오리가 느끼는 그 따뜻함에 의하여,
부풀어 나오게 한다. 봉오리가 열리면서 장미가 꽃을 피운다.
태양이 꽃을 피울 때까지 사랑해주기 때문이다.
태양이 장미가 피어나게 만드는 동안에 태양의 힘은 소진하고, 잠자리에 든다.
밤은 찾아오고 장미는 달빛에 물든다고 하여 버림받았다고 느껴야되는가?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모두를 따듯하게 하는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모든 피조물을 따뜻하게 해 주도록 되어 있다.
만약 우리가 무시되고 있고, 이용되고 있고, 멸시되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오로지 우리의 삶에서 줄 것을 충분히 가지지 못하는 것뿐이다.
이해하겠는가? 멸시는 오직 주는 것이 부족할 경우에 가지게 될 뿐이다.
이제 새로운 눈으로 애인을 돌아다보자.
당신을 장미로, 그리고 그들을 태양으로 생각하고,
순간의 마술이 당신을 따뜻하게 하고 당신을 확장하게 만들었다면,
동등한 상대방으로서 그들은 당신을 피어나게 만들고 성장하게 만든 이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당신의 나머지 삶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하는가?
당신의 나머지 삶은 당신이 책임져야 되지 않겠는가?
여성이 가치 있으려면 남성이 꼭 필요하다.
청중에서 가장 강한 여자 분을 예로 들어보자.
그 분 앞에 적절한 시각에 적절한 남성을 앞에 세워 보도록 하라.
그녀는 허물어지게 된다. 이런 얘기를 듣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다. 당신은 약해진다.
남성이 당신을 약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랑의 힘인 것이다. 이제 당신이 부차적인 역할을 담당해 보라.
그리고 당신은 그 사랑의 수용자가 되어 보도록 하고
열애를 나눌 때에도 그렇게 표현하기 시작해 보라.
남성을 당신의 자궁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신성하다. 이렇게 모이는 것만큼 신성한 일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러한 수용자입장에 서 보지 못한다면
당신은 무엇인가 되어 있다는 느낌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
그럴 때 당신은 변하고 필요하게 되는 것에 말려들게 된다.
그래서 당신은 자신을 지나치게 몰아 부치고, 지나치게 행동하며,
사랑의 흐름을 막아버린 것만큼 가치 있게 되려는
노력으로 자신을 노예화로 내몰게 된다.
그 남성이 당신에게 주고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주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가 일어나고 다음날 아침에 떠나버리고 당신을 보기 위해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당신은 무엇 때문에 고통을 받겠는가? 당신은 그 어느 것 때문에도 고통받지 않는다.
사랑을 하는 이는 아무 것도 잃지 않는다.
당신이 가지려고 할 때만 당신은 잃게 된다.
그리고 남성. 방망이의 신사, 걸어 다니는 방망이 여러분.
어느 위대한 사람도 방망이 길이로 그 위대함이 측정되지 않는다.
남성은 온 세상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할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아직도 세상은 더 넘쳐 나야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다급함 때문에 이 지구상에 더 많은 인간을 추가해 놓아야 한다고
짧은 바지만 걸친 채로 돌아다닌다. 일종의 통제 불능에 빠진 박테리아이다.
우리 시대엔 이러한 현상을 방망이 병이라고 이름하였다.
전에 관찰하여 보지 않았는가?
당신은 가난한 나라를 가난으로부터 구제해주기 위해
당신의 아들과 남편을 전장으로 보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 갔으며,
그들은 그곳의 여인네들을 외로움으로부터 구해 주어야한다고 생각하였다.
당신의 아들이나 남편, 아버지가 돌아올 때쯤이면
그 자신의 일부를 뒤로 남기고 떠나왔다.
다음 세대에 나타날 자신들의 일부를 남기고서.
남성은 애인이 되고싶다는 그 필요에 의해 지배된다.
그들은 야생 씨말과도 같다. 그리고 통제가 안 되는 이는 그저 통제가 안 된다.
그리고 항상 당신의 가슴을 아프게 할 것이다.
그러나 때가 찾아온다.
지극히 완고한 남성이라도 그가 무릎을 꿇어야하는 하는 순간이 오게된다.
그리고 그는 오직 한 곳만을 바로 보고만 싶어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한 남성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진정 주목을 받는 사건이고 그것은 달콤한 것이다.
왜냐하면 남성은 좀처럼 사랑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욕정에 빠질 뿐이다.
그저 성교를 할 필요, 소유할 필요, 무리 지을 필요, 지배할 필요에 빠질 뿐이다.
좀처럼 남성은 정열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정열에 빠질 때이면 그것은 달콤하고, 겸손한 것이다.
마음을 열고 주는 것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마치 거대한 댐이 터지는 것과 같다.
그리고 적당한 때가 오면 그들은 그렇게 한다.
이러한 사랑을 받게 되는 여성은 축복을 받은 이이다.
그러나 남성도 이것을 느낀다.
그도 누군가를 모든 수준에서 사랑할 기회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사랑할 수 있다. 그의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다.
그의 누이와 형제를 사랑할 수 있다.
그는 사랑 받는 여성에서 자신의 어머니에서 만져볼 수 없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누이에게 금지되었던 것을 그 사랑 받는 여성에서 볼 수 있다.
그 여성은 한 남자에 대한 모든 것의 원형으로 인정할 수 있다.
그 원형은 그를 마음과 육체,
영적인 모든 수준에서 완전하고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그 순간에 여성은 여신이 된다. 그녀는 어머니의 힘을 부여받은 신이 된다.
누이로서의 힘을 가진 신이 되고, 아버지로서의 지위를 가진 신이 된다.
그에게 모든 아름다운 것으로부터 주어지는 힘을 가진 신이 된다.
그때가 한 남성이 전폭적인 사랑을 줄 수 있을 때이다.
이러한 사랑에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가 줄 수 있을 때까지 그는 준다.
그 여성이 그에게 어머니를 일깨워준다면,
그는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느끼고, 그 마술은 사라져 버린다.
애인이 그이의 누이를 일깨워준다면, 그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 마술은 끝이 난다.
애인이 아버지를 일깨워준다면, 그는 어리석음을 알고 비천하게 느낀다.
그러나 그의 욕망은 그들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다.
알겠는가?
자 이제 연인사이에 마술이 생기는 때는 언제인가?
당신의 여성이 그녀의 아버지를 사랑하지 못했던 그러한 사랑을
당신에게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때이다.
당신의 여인이 당신의 팔에 안겨,
그전에 결코 느껴보지 못한 편안함을 느끼도록 허용한다면,
그녀는 당신을 사랑할 것이다. 당신의 여인을 하고싶은 데로 놓아줄 수 있다면,
비록 일 천명의 사내와 잠자리를 같이했다해도,
당신의 팔에 안기는 순간이면 마치 처녀처럼 순수하게 느낄 수 있게 해 준다면,
그렇게 사랑해 준다면, 풍요로운 사랑은 그녀로부터 끊임없이 흐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들 모두가 당신의 삶에 금지된 것을
사랑하는 서로에게 표현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필요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족함도 없이, 벌함도 없이, 아무런 고문도 없이 허용한다면,
당신은 축복 받은 이이다.
당신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 허공을 활성화시켜 당신의 자식을 낳도록 할 것이다.
서로 무한한 사랑을 주게 되고, 무한히 허용하며, 무한히 지지해주게 된다.
그때 당신은 하느님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제 무엇인가를 배웠다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배우기는 했는가? 사랑에 대한 보다 숭고한 정의를 가지게 되었는가?
이것에 입문할 때까지 잠깐 기다려 보라.
이제 당신이 격이 다른 사람으로 성장해 볼 가능성이 있는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 되는가? 그리될 것이다.
정열적 관계에서 영적인 관계로 변화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이에 동의하는 사람이 몇인가? 그렇게 된다.
성관계가 줄어들었다고 해서 사랑이 줄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보다 더한 무엇이 된다.
왜냐하면 사랑은 이제 갑자기 성관계만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다른 수준에서 정의되고, 그 수준에서 정의를 이해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이것을 이해한 이는 몇인가?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연인을 위해서 변해갈 때
그리고 당신이 육체적으로 더 이상 그에게 매력이 있지 않다면,
당신이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음을 모르는가?
그것은 성장을 의미하고 변화를 의미한다.
어지럽고 정염에 불타는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보다
더 큰 마술이 영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다 그렇게 거칠게 출발한다.
섬세한 사랑은 황금으로 치장을 하게되고 영원히 지속적으로 주는 사랑으로 맺어진다.
결혼하고 성관계를 가지며 자식을 얻은 마스터가 있는가? 그렇고 말고! 그렇지.
가장 섬세한 마음을 가진 인간 중의 일부는 하느님의 사랑을 색다르게
같이 나누는 남성과 여성으로부터 오게 된다.
그리고 그런 씨앗에서부터 명성 있는 이들이 태어나게 된다.
그들은 지혜와 사랑으로 수정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 관계가 이 학교에서 마스터가 되고자 하는 당신의 능력을 감소시키는가?
관계란 것은 지극한 문제를 동반한다.
마치 어린아이를 키우는 것처럼 하루에 24시간동안 돌보아 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주는 것을 연습할 기회,
야생의 기질에 마구를 채우고 사랑으로 바꿔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그것을 통과한 이들이 있다. 그리고 여러분 아직 이쪽 편에 서있다.
그러나 아마도 당신은 그 관계에서 관계가 주는 선물의 본질을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정자와 난자를 주고받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
타액을 교환하는 그런 것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을 주는 것에 대한 것이다.
절대적으로 그리고 아무런 조건 없이 주는 그런 것이다.
관용을 배우고 허용하고 사랑하는 가슴으로 주는 친절을 실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관계가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다른 이면에는 생명에 대한 보다 더 정열적인 사랑이 있고,
보다 정열적인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있는 것이고,
아침에 피어나는 장미나 나비의 날개나 아이들의 웃음 속에 그 사랑을 그려내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잠자리를 했던 그 어떤 사랑보다도 충족을 가져오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다. 지금까지 당신은 당신의 성적 능력을
남성이나 여성과 같이 잠자리를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측정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 것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하나의 권리이다.
사랑을 주는 권리를 얻는 것이고 다른 사람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권리를 얻는 것이다.
당신의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연인과 그 관계가 그리스도로 되어 가는 도약판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어느 날 당신은 모든 사람의 눈에서
당신의 연인을 사랑하라는 압력을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실로 당신은 유별나게 축복 받는 이가 될 것이다.
초라한 그이를 과거 그 어느 때, 가장 아름다울 때 보다
더욱 사랑할 수 있음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영성이 들어있는 그 육신 자체를 넘어 간다면,
그렇게 되었을 때 당신은 더 이상 이 지구상에 속하지 않는다.
당신은 보이지 않는 세상의 한 일부로서
이 지구상 영역에 비추어지는 그림자로 측정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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