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타2

[스크랩] 7. 부모와 아이들의 사랑 Parents/Children and Love

염결 2014. 9. 13. 20:44

Parents/Children and Love

 

부모님과 사랑

 

 

 

 

 

좀더 알아보기 위해서 좀더 세분해서 나누어 보자.

 

마스터카롤라, 칠판에 이렇게 써주겠소?

 

부모, 모친, 부친, 아이, 친구, 적, 어른, 애인, 남편, 아내. 이제 무엇이 남았는가?

 

개, 고양이, ...애완동물? 애완동물, 이웃, 도반. 훌륭하다!

 

그 자체로서 깔끔한 목록이 되었으니.

 

 

 

이 목록이 사랑을 표현하는가?

 

그런가?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태어났는가?

 

이 방의 다른 면을 보자.

 

당신들 중 몇이 태어났는가?

 

 

 

 

부모가 당신이 잉태되는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이가 몇인가?

 

부모중 한 분은 적어도 즐기고 있었다고 아는 이들은 몇인가?

 

이 방에 이쪽은 어떤가?

 

적어도 한 분은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주고받는 순간 당신이 잉태되었다.

 

그렇지 않은가?

 

동의하는 이가 몇인가?

 

 

 

그러므로 지금 당신이 익숙하게 여기는 그 부모는,

 

그들이 나누었던 경이로운 욕정 속에서 당신을 사랑으로 존재케 하였기 때문에 부모라고 불리는 것이다.

 

주는 자와 갖는 자가 있었으며 남성과 여성이 있었던 것이다.

 

서로 주고받을 수 있도록 우리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남성은 분명히 여성의 깊은 보금자리에 씨앗을 뿌릴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그것은 주는 행위이다.

 

그리고 여성은 갖는다.

 

또 여성이 아이를 만들 때, 그녀는 아이에게 주는 것이고, 아이는 갖는 것이다.

 

옳은가?

 

 

 

그러면 부모는 창조적 사랑을 대표하는가?

 

동의하는 이가 몇인가?

 

그들은 그렇다.

 

그 한순간 동안에 그들이 함께 있는 전적인 이유가

 

당신이 환생의 뒷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임에도 그러하다.

 

그 짧은 시간동안에 허용해준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이러한 견지에서 부모를 다시 본다면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부모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으로서 내면적으론 하느님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육신이라는 옷을 걸치고 양과 음의 양극으로 편향하여

 

양극화되어갔음을 이해하게 된다.

 

양과 음이 한데 어울려 하나됨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해하겠는가?

 

우리는 지금 순간적인 사랑만을 가지고 있다.

 

 

 

아이가 잉태되고 나서 그 특정한 날 밤에

 

누가 어떤 것을 느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아있을 수 있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주는 것과 받는 행위로서

 

우리가 창조했다는 느낌을 비로소 가지게 된다.

 

우리가 해냈다고 느낀다.

 

그 일을 함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주게된다.

 

이것을 이해한 사람이 몇인가?

 

 

 

그리고 부모는 인간이다. 그들은 당신만큼 알지 못한다.

 

또 확신컨대 여러분의 아이는 당신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당신의 부모가 사랑을 표현할 때마다, 그들의 주는 속성에서 그렇게 한다.

 

여기 있는 여러분 중에 일부는 특히 다행스럽다고 할 수 있는데,

 

아직도 부모가 헤어지지 않고 서로 같이 있으면서,

 

서로 합쳐 있고 주고받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몇인가?

 

그것은 아름답다. 당신의 부모가 어떤지 보라.

 

분명히 이따금씩 그들을 묶어주는 어떤 느낌을 반복하여 가지게 된다.

 

그것이 끈끈이이고 그것을 사랑이라 한다.

 

이해하는 사람이 몇인가?

 

아시겠지만 당신은 그 사랑의 산물이다.

 

 

 

그러니 탄생은 고상한 일이 아니겠느냐?

 

당신이 자신의 삶을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선물이다.

 

부친과 모친이 함께 만나 정열(사랑)이 지극했을 때 몸을 섞고,

 

그리하여 당신이 창조된 것으로 당신은 그들의 선물이다. 진정 아름다운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약간의 문제가 있다. 당신은 어떻게 부모를 사랑하고 있는가?

 

부모를 사랑이나 하는가? 당신의 부모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최근에 당신이 부모에게 드린 것은 무엇인가?

 

자, 이제 이것을 살펴보자. 당신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부모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고 저렇고, 또 요렇다“고 말한다.

 

무엇을 하는 것인가?

 

사랑이란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는 것에 대한 것이다.

 

당신의 부모를 진정 사랑한다면, 당신이 그들을 공경해야할 것이다.

 

그들에게 사랑을 주고, 관심을 기울여주고, 시간을 배려해야한다.

 

하느님이 주는자가 아니던가?

 

아이들은 어떤 면에서 갖는자가 아니던가?

 

그건 그렇다.

 

부모가 있는데서 어떤 식으로 음식을 들고 있는가?

 

어떻게 부모를 사랑하고 있는가?

 

 

 

부모를 실망시킨 이들은 몇인가?

 

부모를 한 번도 실망시켜보지 않는 이들은 몇인가?

 

부모 때문에 실망하고 상처받은 이들은 몇인가?

 

 

 

사람들은 자주 사랑과 필요를 혼동한다.

 

절실하게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보거나 그의 곁에 가본 사람이 있는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갖는자이다. 이것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필요로 하는 사람이 갖는자라는 것이 의문이라면,

 

그가 사랑을 표현하는 걸 본 일이 있는지 다시 보라.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몇인가? 그들은 사랑을 나누지 않는다.

 

그들은 사랑을 받는 상태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상태와 사랑의 상태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오직 다른 이들이 자신의 필요를 만족시켜주지 못한다는 것만을 이해한다.

 

그리고 자신의 필요가 만족이 안되면 대부분 실망을 느끼게된다.

 

 

그 필요성은 당신의 모친이나 부친이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기를 바라거나

당신이 잘했다고 말해주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작은 것일 수 있다.

그들은 아마도 당신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실망을 한다.

당신은 그렇게 말해주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당신은 그들이 그렇게 말해주는 것을 필요로 하는가?

잘 보라. 이것은 매우 간단한 것이다.

그 사건이 일어난 다음에 당신의 삶에서 큰 깨달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의 부모가 당신이 무엇인가 좋은 일을 했다는 것을 인정해주기 바라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몇인가?

그러면 이제 아이들에 대한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의 문제는 그들이 한 때 아이였다는 것이다.

아무도 수염이 난 채로 자궁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그리고 매우 적은 종만이 임신과정을 거쳐 태어난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모두 한때 아이였다.

 

보다 가능성이 큰 것은 아이들은 그들이 배운 바대로 부모로서 성장해나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배운 바와 같이 뇌가 학습하는 방법이

환경에 대한 반응으로서 현실을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맞는가?

 

 

필요로 하는 아이가 자라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필요로 하면서 자라난 어른은 여기에 몇이 있는가?

알았다. 어쨌거나 괜찮다. 고백은 영혼에 좋은 것이다.

나중에 그것을 크게 소리 지르게 만들어 주겠다!

 

지금은 내가 당신에게 던져주겠다.

왜냐하면 이것이 당신 모두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이제 그것을 모두 거둬들이고 한데 모아서 던져 버리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들이 한때 그것 때문에 곤란스러워하기를 바라기 때문이고,

또 사랑을 배워야할 한 시점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것이다.

만약 우리가 가장 지고한 느낌이 주는 행위라는 것을,

주는 행위가 사랑 그 자체라는 것을 안다면,

주는 자로서 우리는 필요로 하는 상태에 있는 일은 거의 없게 될 것이다.

사랑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삶에서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게 느껴질 정도로 사랑에 빠져 본 이가 몇인가?

이제 그것이 내가 말하는 바라는 것을 알 것이다.

당신이 사랑의 상태에 있다면 하느님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당신이 하느님의 상태에 있다면 당신은 필요로 하는 상태에 있지 않게 된다.

당신은 환희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한 사람을 대상으로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만 이해한다.

그들은 그것이 모든 생명을 포함하고

그러므로 모든 인류를 다 포함한다는 것을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랑은 360도의 원이다.

그것은 그 원의 30도만 떼어낸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어야 한다.

마치 하느님이 그 모두인 것과 같이 그러하다.

이해하는가?

 

 

이제 부모는 존경받고 공경 받아야한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자식이 자신의 부모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사랑은

그 부모가 되고 싶어 하는 그것이 되어주기를 같이 바라는 것 외에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알겠는가! 부모를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해야 한다.

 

말을 바꾼다면, 당신이 부모에게 실망했다면

그것은 당신이 자신에게 실망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은 또 당신이 자신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의 부모 또한 인간이다! 그들은 하느님이다!

사실상 그들은 당신의 형제이고 자매이다.

그러므로 이제 성숙해지고 그것을 알라.


당신 부모에 보답하는 길은 당신의 삶의 책임을 그들에게 지우지 않는 것이다.

당신 자신의 삶에는 자신만이 책임이 있다.

당신이 무엇이라고 소리쳐도, 당신이 책임을 져야하고

부모에게 사랑을 바치고 그들이 무엇이 되고자 해도

그것이 될 수 있도록 지원을 하고 여유를 가져 주어야 한다.

이것을 이해한 사람은 몇인가?

 

만약 여러분의 부모가 “너한테 지극히 실망했다.

네가 공부하는 그 분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네가 젖소를 키우는 것이 좋게 보이지 않는다.

너는 사무직을 해야 한다!”와 같이 얘기한다면 어떤가?

불안한 사람에게 이는 폭발적인 말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매일 일어난다.

부모는 날마다 아이들에게 실망을 하고 아이들은 부모에게 질색을 하게 된다.


당신이 부모에게 이렇게 대답하면 어떤가,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것도 좋습니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저는 그래도 부모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한다면?

“나의 젖소를 팔아버리고 사무직 일을 하기를 바라세요?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어요?

전 부모님 때문에 전 행복합니다.

부모님, 사랑합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부모에게 비판받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적이 있는가?

이제부터는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이를 이해하는 사람이 몇인가?

 

여러분 중에 하느님을 비난한 사람이 몇인가?

당신의 하느님을 비판한 사람이 몇인가?

당신의 하느님이 당신을 내팽개친 적이 있는가?

당신이 아직도 살아있는가?

아직도 한이 맺혀 있는가?

하느님은 아직도 거기에 있다.

허공은 당신에게서 거두어가지 않았다.

 

 

이제 여기서 도덕은 이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조건적이 되지 말아야 하는 것,

그리고 주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이해해준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당신의 부모를 이해해준다면 그것은 용서이다.

그것이 당신에게서 깨끗이 정리가 되면, 부모에게 전달될 것이다.

그때 당신은 그들을 더 이상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랑으로 감싸게 된다.

이것을 이해한 이가 몇인가? 그렇게 될 지어다.

 

이제 형제와 자매이다. 그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여러분 중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형제나 자매와 문제를 가지고 있는가?

형제와 자매는 진정 하느님 안에서 형제와 자매이다.

그리고 부모는 그 자신을 낳아준 형제와 자매이다.

하느님이 그 자신을 낳은 것이다.

형제와 자매는 나름의 독립된 개인이다.

 

자신의 형제와 자매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이가 몇인가?

왜?

그 원한이 당신에게 어떻게 하였는가?

그것이 당신의 새아침을 기분 좋게 만들었나?

밤에 잠자리를 편하게 하든가?

그들은 당신의 삶에 선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이나 해 보았는가?


당신의 삶에서 그들의 행위가 없었다면,

당신이 이곳에 오려고 하는 그 결정을 내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형제와 자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사랑은

그들을 그저 사랑하고 그들을 이해하고

가슴 깊은 따뜻한 생각을 줄 수 있는

여유를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가?

 

핵심은 이것이다.

만약 당신이 하느님이 되고자 하고, 천국으로 올라가려 한다면,

여기에 적을 남기거나 빚을 지고서는 떠날 수 없음을 알아야한다.

그것을 이해하는가?

그리고 하느님이 되기 위해서,

만약 하느님이 360도 원이라면, 자신의 30퍼센트는 주는 행위로 엮어놓고

70퍼센트는 갖는 행위로 엮어놓고는 하느님이 되지 못한다.

이해하는가?

원한을 갖는 것은 갖는 것이다!

형제와 자매에 대하여 원한을 품는 그런 태도를 떼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갖는 것이고 주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그 다음 목록이다.

아이들! 부모들이 몇 분 계신가?

누가 아이들에게 주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아이들에게 주었다.

이것을 하루에 몇 번씩 아이들에게 일깨워 주었는가?

아이들에게 죄의식을 느끼게 하고

그 때문에 여기에 있어야 된다고 한 이는 몇 분 계신가?


이제 아이들에 대해서다: 그들은 누구인가?

글쎄, 그들은 다른 생에서 당신의 부모이었을 수도 있다.

때로는 그들도 그렇게 했었다. 그렇지 않았겠는가?

이러한 이야기를 전에 들었을 가능성이 없을까?


가령 200년 전쯤에. 당신의 아이는 실제 당신의 부모이었고,

당신은 그들에게 그렇게 힘든 시간을 마련해 주지 않았을까?

그런 일을 또 하고 또다시 반복하고 또다시 하고,...

마침내 당신의 모친은 심장병으로 쓰러지고,

부친은 알코올중독으로 망가져서 달아나 버리고,

당신은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들이 당신의 삶에 나타나고 그래서

그들은 당신한테 그렇게 낯설게 보이지는 않게 되는 것은 아닐까?

 

당신의 아이들은 그저 당신에게서 빼앗고 또 빼앗고 또 빼앗지 않는가?

아마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이 그들에게서 뺏고,

또 뺏고, 또 뺏었기 때문일 수 있지 않을까?

잘 살펴 보라. 당신의 아이들은 한때 당신의 부모이었던 것을.

이제 우리가 그 운명의 상황을 이해했다면, 정말 그럴듯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러한 관점에서 상황을 다시 보라.


당신의 아이들은 그들이 강요당하는 것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들은 뺏고 뺏고 뺏는다.

그것은 주는 것을 아직까지 배워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바로 전생에서와 같이 그들은 뺏기고 뺏기고 뺏겼을 뿐이다.

그러나 주는 기술, 사랑의 기술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신도 마찬가지이듯이 아이들도 그러한 느낌이 무엇인지 배워야 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바치는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보다 준다는 것을 의식화한 교육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다른 누구엔가 줄 수 있도록 배워야 한다.


하느님이 사랑이란 것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은 언제나 그들과는 멀리 떨어져 낯설게만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제 당신의  일은 무엇인가? 당신이 할 일은 당신의 아이에게 사랑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형태의 사랑은 그들에게 같은 것을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된다.

 

누군가의 생일을 기억하는 것, 혹은 그리스도의 성탄절과 부활절을

축하할 수 있게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그들이 소속된 문화에서 감사하는 시간으로,

주고 나눔을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의식적 입문절차이다.

주고 나누는 것, 그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기억하라.

현자가 예수가 벤 조셉이 아직 가난하고 어린 아이였을 때

그에게 다가가 그 아이에게 황금과 몰약과 진귀한 비단을 주었다.

그 아이는 아직 가치감각 같은 것은 없었을 때이다.

그 아이가 황금이나 몰약과 같은 것에 관심이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위대한 자가 비천한 자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알겠는가? 그것이 숨겨있는 뜻이다.

 

만약 당신의 아이들을 가르치지 못한다면,

분명히 당신은 다시 그들의 자식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당신 자식과 같은 아이를 부모로 두어야 하다니,

생각만 해도 절망스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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