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 안녕하세요. 아름다운이여.”
“여기 쪽지에 묻고 싶은 것을 써서 왔습니다.
당신 앞에 서면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 내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은 고맙게도 사랑과 아이들,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에 이해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나의 삶의 전부였던 것 같다.
당신이 가르친 것이고 내가 믿고 내가 시작하고 그리 종말을 맞는 날까지
지고 가서 그 한마디로 맺을 것이다. 사랑. 그것이 끈이었다.
그것이 자연의 모든 것을 묶고, 우리와 우리 존재 전체를 묶는 것이라면,
그 사랑에서부터 꿈이 탄생하고, 그 꿈이라는 것은 자유에 대한 것이다.
나는 항상 사람들에게 그것은 책임 있는 자유이어야 한다고 말해왔다.
나는 한 체제를 세우고 있고 그 자유의 체제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체제는 무엇보다도 사랑 속에 세워져야 되고
그 사랑 속에 운영되어야 된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혼돈을 수용하면서 창조성을 억누르지 않는 것이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체제를 세우는 입장에서 -학교라는 체제를 세우는 입장에서-
그것은 많은 혼돈을 허용하면서 동시에 가치 있는 삶이라는
균형을 조절해 나갈 수 있는가?
목표는 규율을 지켜 나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규율을 성장 시켜서
규율의 체제도 규칙이나 법체계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좀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된다.
그러나 그 균형을 유지해 주는 것이 어렵다고 해서
가치 있는 삶이란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편에 서고 싶지는 않다.
이러한 뜻은 아마도 태초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라고 본다.
이 지구에서 인간이 되는 신성한 목적은 미지의 것을 아는 것이고,
그것을 자유 속에서 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리되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이 지금 시간에 일어나고 그것이 진실이다.
그렇게 될 때까지 그들이 준비가 되도록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왜 이러느냐면, 오직 아이들만을 통해서
지구 존재의 자유는 진정으로 얻어 지게 될 것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키워진다면 그들은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의 설명이 필요하다.
언제 우리가 혼돈의 경계를 넘어 무가치한 삶으로 떨어지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언제 가치 있는 삶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분별할 방법을 알려달라.
이 질문의 두 번째 부분은 나의 내면의 어느 곳에 이런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있으며,
이것이 내 자신에게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바램과 사랑은 어디에서 온 것이며 또 어디로 가는 것인가?”
“먼저 물어보자. 사랑하는 여인이여,
아이들을 사랑하며 자유롭게 키웠다고 느끼는가?
그리고 그들은 당신이 생각한 대로 그렇게 자라났는가?”
“그렇다. 그들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더 낫다.”
“그렇다면 당신의 비밀은 무엇인가?”
“그들은 나의 삶에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언제라도 그들과 함께 있지 않는 생각은 조금도 가져보지 않았다.
나는 그들보다 낫다는 느낌도 가져보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가르친 것보다 더 많이 나를 가르쳤다.
그들과 더 오래 같이 지낼수록 나는 마치 그들의 형제자매가 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그들이 자신의 지혜로 꾸며나가는 것을 더 많이 허용하고
그것을 지켜다 보면, 내가 요구했고 기대했던 것보다 더 높은 무엇을 신임하게 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면 나의 요구나 기대에 관심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내면에 지혜가 갖추어져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들의 영혼이 그 스스로의 바램에 따라 성장할 수 있도록 놓아둔다면,
항상 최선의 결과로 이어졌다.
그 결과는 내가 상상할 수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만약 당신이 다시 뒤로 돌아가 다시 삶을 꾸며볼 수 있다면,
어떻게 다시 아이들을 키우겠느냐? 무엇을 바꿔보고 싶은가?
심각하게 생각해 주기 바란다.”
“내가 보다 현명하고 내 자신을 보다 더 인식할 수 있기를 바랄지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보다 많은 영감을 얻는 동기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나중에 그들이 영성으로 다시 회고할 수 있는
영감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혼돈의 시간이 적고 실질적인 창조에 많은 시간을 가진다.”
“그렇다면 부모가 아이들에게 해야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아이들에게 미래를 열어주는가?”
“그들을 당신에게 데려 오는 것!”
“나에게? 그것이라면 좋은 시작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오직 짧은 시간으로 일년에 며칠이다.
다른 모든 시간은 그들이 살고 자라나는 시간이다.”
“정확하다.”
“그 시간은 그들의 것이어야 한다. 나의 것이 아니다.”
“바로 그렇다.”
“그리고 그 시간은 이 지구가 마련해 줄 수 있는 최고의 것과 관련이 되어야한다.
같이 지낼 수 있는 최고의 사람과, 최고의 아이디어, 최고의 즐거움,
그들을 깨우칠 수 있는 최고의 순수함을 지녀야하고, 최고의 자연이 있는 곳이고,
이 지구상에 최상의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그들이 기억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도 최상이 것이며,
그리하여 결코 옆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해야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도 믿는다.
아이들은 장미화원에서만 자라고 어미가 편하게 생각하는 것만 배워서는 성장할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은 그 자신의 영혼을 따라서 살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영혼이 그들을 샛길로 끌어내리면, 그것을 스스로 부딪쳐야한다.”
“그것이 바로 분명한 진리이다.
어느 아이들에게나 당신이 마련해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은
바로 당신이 정한 그것들 이다.
그러나 그것에 토대가 되는 것은 사랑이 주어지는 것이다.
준다는 것은 지혜와 배움,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는 기예,
학교교육, 예술을 가르쳐 주는데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다.
미리 가꾸어주는 시간도 필요하다.
아이가 가질 수 있도록 줄 수 있고 허용할 수 있을 때까지 그러하다.
그리고 나서 아이들에게 당신에게 받는 것을 줄 수 있도록 가르쳐야한다.
그렇게 하여 고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아이들이 당신에게서 받은 것을 다시 주고자 할 때,
아이의 영혼이 길을 잡아가기 시작할 때,
아이의 보다 큰 조화로움이 몸에서, 영성에서 마음에서 퍼져 나간다.
그것이 사랑이 아이들에게 의미하는 것이다.
해야 할 것은, 그들을 돌보아 주고, 당신이 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고,
주는 인내를 감수하면서 아이가 잘 돌보아지도록 신경을 써야한다.
그리하여 아이가 그가 받았다는 생각으로 입문할 때이면,
그것을 돌려줄 수 있도록 해야한다.
그것은 매우 간단하다. 이 기본적인 가꿈을 아이들에게 마련 해주는 것이다.
부인. 모두가 그리해야한다.
아이들을 배우게 만들어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황폐화시키는 것이다.
배움에 있어 균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은 활동이다.
당신이 여기에 올 때, 배우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주고, 당신은 가진다. 맞는가?
그리고 당신을 일상으로 내 보내고 당신은 주어야만 한다. 맞는가?
이번 주가 지나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고 삶에서 그것을 적용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아이들이 그것을 하도록 배울 수 있기 원한다.
그들이 그것을 실행해 볼 수 있는 삶이 충분히 있을 것이다.
부모는 막역한(confidante)친구가 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그리하여 지혜가 아무런 판단도 거칠 사이 없이 전해질 수 있어야한다.
그리하여 배운 것에 대하여 다른 대체도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영혼이 여기에 있는 이유는,
또 그들이 국화빵 찍듯이 이미 만들어진 몸으로 오지 않는 이유는
그들을 낳아주고 가르치는 부모의 손에 양육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이가 당신의 삶에 같이 있는 이유이다.
그 지식의 실제적 적용기술을 가지게 되고
그것을 세상에 돌려주고 풍부하게 되는 것을 배운다.
오늘날 아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아이들이 아이들이 될 수 있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어른이 되도록 강요한다.
어린소녀들이 가임기가 되기만 하면 아이를 갖게 하고 있다.
그들은 어린시절을 잃어버리게 된다.
어린이들은 어른이 된다는 것을 포용할 수 있을 때 까지
오랫동안 어린이로 남아있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영적인 가치가 부족하다.
영적인 가치라는 것은 흔히 종교에서 말하듯이 아이들에게
죄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우치고
자신의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창조하고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그들의 내면에 있는 신성한 성품이다.
아이들에게는 그 성품에 있어 동등하다.
그래서 그들이 세상으로 떠났을 때 그들은 부서지고 깨뜨려진 곳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뿌리를 둔 안전한 곳에서 온 것을 알 수 있어야한다.
그리하여 그들의 하느님이 그들이 배운 그 지성에 뿌리내려 있어야한다.
그때 그들은 이 세상의 보배가 된다.
그때 그들은 줄 수 있고, 그렇게 주면서 불안함을 느끼지 않는다.
이해하는가?
그래도 아이들 중에는 일정한 나이가 되면,
마치 젊은 망아지가 목장의 담을 넘어 튀어나가듯이, 집을 나가 버리는 이들이 있다.
그렇게 나갈 수 있도록 놓아두라.
그리고 그들은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고,
사람들과 문제를 일으키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때 당신이 가르친다. 이해하겠는가?”
“그렇게 하여 그들의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나가는 것인가?”
“바로 그렇다.”
“글쎄, 나도 그렇게 하겠다.
그리고 아이들을 여럿 모아 놓았을 때, 그때는 부모자식간의 관계가 아니다.
크고 작은 아이들과 통제하지 않는 어른의 사회가 된다.
당신도 그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고 실행할 수 있는 체제를 지지하는가?
내가 먼저 아이들에게서 일어나는 것을 목격한 그것이
학교에 가서도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극히 괴팍한 생각까지도 진화시켜 나왔다.
이런 것을 시도해본 우리 중 일부는 그러한 체제를 떠나길 바라고,
또 어떤 이들은 그 체제를 시작하여 사람들이 이해하고
진화할 수 있어야 된다고 느꼈고, 또 아무 것도 하지말고 아이들과
사람들이 어떻게 될지 그리고 그들이 필요로 하게 되는지의
여부를 두고 보아야한다고 하는 이도 있었다.
아니면 그들이 그것으로부터 배우고 그리고는 거만하게 떠나버려야 하는지?”
“나는 부모가 아이를 직접 키우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커다란 잇점이 있다.
부모는 주는 행위를 할 수 있고, 사랑이 흐르고,
그리고 서로의 믿음이 흐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바람직하다.
그리고 다른 방법은 아이를 학교라는 체제에 보내는 것이다.
그렇지만 학교에 가는 시간만큼을 아이들과 보내고
아이들과 같이 일을 하는 시간으로 배려하여 그 균형을 잃지 않는 것이다.
학교가 아이들에게 ‘그것은 불가능해’라고 가르친다면,
당신은 이렇게 말해 주어야한다.
‘그렇다면 너는 무엇을 믿어야하니?’라고.”
“나는 학교라는 체제에 대해서 대부분 거부감을 느낀다.”
“아하. 학교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나의 거부감은 큰 것이다.
그러나 이 수준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 환경에서
살아갈 아이들이 많아질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오랫동안 젖어있게 될 아이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러한 사회에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이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놓아두라.
그러나 어느 날 그들은 그것에 반발을 하고 다시 돌아오게 된다.
만약 아이가 배속에 있을 때부터
나의 소리나 모짜르트 음악, 영적인 음악을 들려주면서 시작한다면,
-아무 것도 어렵지 않고, 아무 것도 불편함 없이, 아무 것도 깨뜨려지는 것이 없이 -
만약에 그들이 잠들어 있을 때, 그 음악을 잠재의식에 들려준다면,
그들이 잠들어 있을 때 나의 가르침을 들려준다면, 만약에 당신이 아이들에게 근본을,
그들은 신성하고 신성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들려준다면,
당신은 그들의 길을 보다 쉽게 만들어 주고, 보다 더 들뜨게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들이 자아가 피어날 때쯤이면, 학교라는 테두리에서 무엇을 배웠건,
그것은 그 자신의 가슴속에서 배웠던 것보다 더 크게 남아 있지는 못한다.
이해하는가?”
“영혼이 아이를 책임지기 시작하면 그들 스스로
많은 것을 할 준비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
“그것이 어느 때쯤인가? 아니면 어떻게 그 때를 알 수 있는가?
아니면, 어느 나이 때쯤인가?
왜냐하면 그것이 두 살이 되었을 때부터이라고 느낄 때가 있다.”
“두 살이면 매우 의식이 있는 사람이다. 두 살이면 극히 폭군적이다.
그들은 자유와 탐구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없는 때가 오기 전에 그 모든 것을 뿌리기 원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살아가고 있다!”
“그들을 가르쳐야한다. 당신은 그들과 기꺼이 같이 경험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저 단순히 “가서 그것을 해라”라고 말하지 말라.
당신이 가야하고 그들과 같이 해야 한다.
그들이 모험에 대한 감각을 가질 수 있도록 허용해 주어야한다.
그러나 그 모험은 제한 안에서 이루어져야한다.
그들이 자라면, 당신도 알다시피 그 영역은 점점 더 커지고 커지고 그렇게 된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십대가 되면, 옹고집이고 단단하면서 발광적이 된다.
쿤달리니가 그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서기 때문이다.
당신이 어떤 부모이든지 관계없이
그 에너지에서 결과되는 에너지에 의해 지극한 어려움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그 에너지가 일어서기 전에 당신이 필요한 것을
근본에서 가르쳐 주는 것이 가장 좋다. 이해하는가?”
“그렇게 겪었다! 이해한다!”
“그리고 당신은 그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는 것을 이해해야한다.
당신이 사랑하고, 허용하기만 한다면, 판단 없이 지혜를 시행하는 것을 바란다면,
당신이 아이에게 항상 문을 열어주기만 하다면, 당신이 배우기를 지속하기만 한다면,
- 당신이 정말 배우기를 계속한다면- 그들은 당신에게서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그것이 어느 부모라도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이다.
당신은 그 아름다운 역할을 해낼 것이다.
글쎄, 나는 아마 당신의 질문에 기대하는 것만큼 매끄럽게 대답하지 못 했다.
왜냐하면 절대적으로 지각의 나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이들마다 다르다. 아이들은 하나 하나가 별개의 개인이다.
그것을 아는 것은 지혜를 얻는 것이다.
언제 밀고 언제 밀지 말아야 되는지 아는 것이다.”
“당신은 이 모든 것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에 대한 부분은 대답하지 않고 있다.
왜 그것이 나의 삶의 초점이 되는가? 왜 그런가?
아이 하나가 이 방에 있으면 나는 다른 것에 집중할 수가 없는가?”
“말해보라.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모르겠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항상 그렇게 되어왔다. 아직도 아마 그러고 있다.”
“당신은 아직도 어린이다. 그러나 그것은 선물이다.
아무 것도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이 당신의 관심사이다.
나는 당신이 무엇을 하는지 안다. 당신은 아이에게 선물과 같다.
그 때문에 당신이 여기에 온 것이다.
오래 전에, 부인이여, 당신은 좋은 엄마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간에 대하여 잊어버릴 것이다. 그것은 과거이다.”
“그런 것이냐?”
“지금은.”
“고맙다.”
“당신을 사랑한다.”
“나도 당신을 사랑한다.”
'람타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 Closing 맺음말 (0) | 2014.09.13 |
---|---|
[스크랩] 21. 부모에게 실망하기 On Disappointing Parents (0) | 2014.09.13 |
[스크랩] 19. 자녀와의 대화 On Raising Children (0) | 2014.09.13 |
[스크랩] 18. 부모에 실망하는 일 On Disappointing Parents (0) | 2014.09.13 |
[스크랩] 17. 애완동물에 대한 사랑과 치유 On Loving and Healing Pets (0) | 2014.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