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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 주역빼곤 科擧 올A

염결 2006. 6. 6. 17:57
퇴계선생, 주역빼곤 科擧 올A
정석태 박사, 이황 자취 찾아 20년… 원고지 1만5000장 연표 정리
기대승과 사단칠정 ‘8년 논쟁’ 2년만에 끝난 것 새로 밝혀내
기생과 로맨스 얘긴 완전 거짓

▲ 정석태 박사는“퇴계는 현실에 발을 딛고 서서 높은 이상을 추구했던 인물이지 공리공론의 인물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덕훈기자
“퇴계(退溪)를 봐라.”

1980년대 초, 지도교수는 이 한 마디를

화두처럼 던졌다. 그때부터였다.

고려대 국문학과 77학번 정석태(鄭錫胎)가 퇴계 이황(李滉·1501 ~1570)의

시(詩)를 문학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한 것은….

그것은 참으로 지난한 험로의 초입일 뿐, 석사 6년, 박사에는 10년이 걸렸다. 이제 그는 깨닫는다. “퇴계의 시는 예술이기 앞서 일상(日常)이었구나!”

실로 엄청난 작업이었다. 퇴계학연구원 정석태 박사가 이번에 낸 ‘퇴계선생 연표 월일조록(月日條錄)’. 모두 2600여 쪽, 4권 분량의 거질(巨帙)을 위해 원고지 1만5000여 장과 20여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퇴계의 저작과 일기, 언행록, 관련 인물들의 문집,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모든 문헌에서 자료를 뽑아낸 뒤 70년 생애의 연·월·일을 면밀히 고증해 해당 원문을 정확히 실은 편년체(연대순으로 기록하는 형식)로 엮었다.

“한마디로 퇴계학 연구의 커다란 전기(轉機)입니다.” 문석윤 명지대 철학과 교수의 평가다. 한국철학의 태두와도 같은 퇴계이지만 그동안의 퇴계학은 극히 제한된 자료에 의해 연구돼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새 자료를 발굴 종합한 이 책은 그야말로 퇴계학의 탄탄한 기단이 새로 구축된 것을 의미한다.

▲ 퇴계 이황
이 엄청난 ‘무기’를 지닌 정 박사는 “50세 이전의 퇴계는 미완성의 인물이었다”고 말한다. 34세 때 과거회시(會試)에 응시한 퇴계는 모든 과목에서 모두 A학점격인 ‘통(通)’을 받았지만 오직 ‘주역’만은 C학점격인 ‘조(粗)’를 받았다. 아무도 주목하지 못했던 희한한 자료였다. “젊은 시절의 퇴계는 아직 ‘주역’을 돌파하지 못했던 겁니다.”

그동안 학계에서조차 잘못 알고 있던 것도 많다. 퇴계가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과 벌였다는 그 유명한 ‘사칠논변(四七論辨)’. 인간 본연의 마음인 사단(四端)은 인간의 생각이 가미된 칠정(七情)과 엄격히 구분돼야 한다는 퇴계의 학설에 고봉이 반론을 제기한 이 논변은 무려 8년이나 이어진 것으로 유명하다.

“아닙니다. 자료를 다시 분석해 보니 딱 2년 만에 끝났습니다. 형이상학적 문제를 오래 끌지 않고 곧바로 인성 수양과 사회개혁이라는 실질적인 문제로 돌아간 것이죠.” 퇴계가 충청도 단양군수 시절 두향(杜香)이라는 기생과 로맨스를 펼쳤다는 일화는? “완전히 날조입니다.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두향은 비슷한 시기 다른 단양군수와 관계를 맺은 인물입니다.”

정 박사는 “흔히 퇴계를 향리에 은둔한 처사로만 알고 있는 것도 잘못됐다”고 말한다. 당시 신진 사림 정권은 끝없이 그를 중앙으로 불러 추대하려 했고, 그의 학맥은 영남뿐만 아니라 수도권인 경기 지역의 제자들에게도 상당 부분 계승됐다는 것.

퇴계가 ‘예술인’이기 앞서 ‘일상인’이었다는 뜻은 무엇일까? “그는 끊임없이 현실을 논의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가사를 돌보고 편지를 교환하느라 분주한 속에서, 비록 자신은 나서지 않더라도 교육을 통해 다음 대(代)를 기약했던 것이죠.” 일상의 모든 짐을 너끈히 감당하면서, 진흙탕 속에 핀 연꽃처럼 높은 이상을 추구했던 인물이 바로 퇴계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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