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관련

천문학의 역사

염결 2006. 8. 9. 14:23
1. 천문학의 역사


천문학의 역사는 인간이 하늘을 바라보며 시작되었다고 하면 맞을 것이다. 철학과 함께 가장 오래된 학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지면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이던 시절을 지나 인간은 좀더 자세하게 해와 달과 별들의 변화를 관찰하게 되었다. 인간은 이미 고대 이집트시절 1년이 365와 1/4일임을 알았다. 정착생활을 하고 농사를 짖기 시작하면서 기후의 변화와 강의 범람시기를 정확히 알 필요를 느낀 인간은 그 해답을 천체들의 움직임에서 얻은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천문학은 인간이 우주에 대한 신비를 풀기 위한 자연스러운 궁금증의 해결을 원하면서 비로소 학문으로써의 기틀을 잡아간다. 이곳에는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시대를 거쳐 서양의 천문학사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소개해 보겠다. 동양과 우리 나라의 천문학사는 그 이해가 쉽지 않고 현재 연구가 활발히 전개되지 않았으며 현대 천문학이 서양의 천문학사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에 다음 기회로 넘기기로 하겠다. 사실 내가 잘 모른다.

(1)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의 천문학의 역사는 역(曆)을 만들면서 시작된다.
농사를 지며 경작생활을 했던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의 물의 변화를 정확히 알 필요성을 느꼈다. 현재 이집트의 역에 대해서는 상세한 것이 알려져 있지는 않다. 이집트 사람들이 처음으로 만든 역은 음력이었다. 음력은 12달로 되어 있고 한 달은 29일 반으로 1년은 354일이 되고 3년마다 윤달을 넣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나일강의 범람이 일정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어느 해는 홍수 사이가 11달이고 다른 해는 14달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나일강의 범람과 대략 일치하면서 더 규칙적인 사건이 있으면 편리할 듯했다. 이 사건이 바로 시리우스(큰개자리 알파별, 별중에 가장 밝게 보인다. -1.6등성)의 출현이다. 그것은 나일강 범람 직전에 나타났고, 365와 1/4일마다였다. 그러면서 이집트인들은 양력을 만들었다. 이 당시 한달은 30일이고 연말에는 5일을 덧붙여 365일을 만들었다.

CF) 현재 우리가 쓰고있는 율리우스력은 로마시대 만든 것이다. 원래는 31일과 30일이 계속 반복되고 11, 12월이 30일이었다. 그리나 위대한(?) 시저(caesar)와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기리기 위해 그들의 생일이 있는 7월(July, 율리우스 시저), 8월(August, 아우구스티느스)을 31일로 하게 되었으며 원래 7월을 의미했던 September가 9월이되고 8월인 October가 10월이되는 등 밀리게 되어 11, 12는 1, 2월로 밀려 마지막 달(?)인 2월이 28일이 된 것이다. 이는 계절적으로도 안맞고 불편하여 반드시 고쳐야 될 것으로 보인다.

초기 메소포타미아의 천문학은 밝은 별들을 확인하고 하늘을 멋대로 나무며, 두드러진 천체나 대기현상을 관측하는 정도였다. 이들은 천체의 조짐에 의미를 붙인 점성술을 시행했는데 나중에는 호로스코프(horoscope) 점성술로 발전하여 왕국의 운명만이 아니라 개인의 운까지 예언하게 되었다. 후에 이들은 행성들의 운동을 관측하게 되었고 행성들의 운동이 천구의 어떤 띠에 놓여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것이 황도이고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12부분으로 나누어 황도 12궁이라고 불렀다.


(2) 그리스 초기 (B.C.6~5세기)

그리스 초기 과학의 시작은 철학과 완전히 일치했다. 우주론 시대라고 불리는 그리스 초기의 과학자(자연철학자)들의 공통의 의문은 "우주를 이루는 근본이 무엇인가?"였다. 밀레토스(Miletos)학파의 세사람을 보자. 탈레스는 우주의 원질(arche)을 물로 보았다. 그것은 물이 가장 흔하고 기체, 액체, 고체로 존재할 수 있는 물질이기 때문이란 해석이 있다. 탈레스는 기원전 585년 개기일식을 예측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라 하였는데 이는 그리스말로 공기(pneuma)는 숨을 뜻하기도 하기에 숨이 생명의 근본인 것처럼 공기가 우주의 근본이라는 생각에서 나온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연에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고, 만물은 끊임없이 변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불을 원질로 보았는데, 그것은 만물을 꿰뚫고 있는 이유이며, 변화 속에서 질서를 가져오는 로고스(logos)이다. 이와 대조를 보이는 철학자가 엘레아(Elea)학파의 파르메니데스이다. 그는 존재만 인정하고 비존재를 과격하게 부정했다. 이는 뒷날 존재를 물질로 본 유물론적 해석과 비물질로 본 관념론적 해석이 갈리게 되었다.그의 제자 제존(zenon)은 스승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하며 힘센 아킬레스도 먼저 출발한 거북이를 결코 앞지르지 못한다는 유명한 역설을 내놓았다.


피타고라스는 수를 우주의 근본실재로 보았다. 이후 엠페도클레스는 물, 불, 공기, 흙의 네 뿌리를 만물을 구성하는 입자로서내놓았고, 아낙사고라스는 네 개의 뿌리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해서 무수히 많은 질적으로 다른 존재 씨들을 말했다. 그 다음에 나온 것이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이다. 이는 우주가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이렇듯 그리스 초기, 플라톤 이전의 과학은 우주의 근본실재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될 부분은 이들이 실용성이 아니라 진리 자체를 추구하기 시작했다는 데서 커다란 의의를 둘 수 있는 것이다.


(3) 그리스 후기

플라톤(Platon, B. C 429? - 347)은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의 영향을 받고, 피타고라스의 종교적 요소와 수학존중,소크라테스의 윤리와 자적론을 이어받아 이원론적인 과학을 건설했다. 그러나 그의 과학에 대한 관심은 과학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플라톤은 그의 윤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학을 했고, 따라서 그의 과학은 윤리성을 띠고 있다. 플라톤의 [대화]들 가운데 만년에 나온 [티마이오스(Timaios)]는 자연철학에 관한 책이다. 그것은 우주가 도덕적이라는 것을 보여 줌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티마이오스는 창조신화를 다룬 본격적인 우주창생론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태초에 창조주 데미우르고스(demiurgos)가 있어 우주를 만들었다. 단, 그리스도교와는 달리 무에서 창조한 것이 아니고 재료가 있었다. 데미우르고스는 원질을 가지고 4원소를 만들었는데, 그 구성 방법이 기가 막히게 기하학적이다. 직각이등변삼각형 4개가 모이면 정4각형이 된다. 정사각형 6개로 둘러싸인 것이 정6면체이다. 이 정6면체로 된 것이 흙이다.

따라서 흙은 직각이등변삼각형 24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두각이 각각 60도와 30도인 직각삼각형 6개는 정삼각형을 만든다. 정삼각형 4개로 둘러싸인 정사면체로 된 것이 불이다. 공기는 정팔면체(정삼각형 8개), 물은 정20면체(정삼각형20개)로되어 있다. 직각삼각형의 수로 따지면 불, 공기, 물은 각각 24, 48, 120개로 구성된 셈이다. 여기서 중대한 결과가 나온다. 흙은 유독 직각이등변삼각형으로 되어 있어 어쩔 수 없으나, 불, 공기, 물은 구성성분이 같은 직각삼각형이다. 더구나 그 수를 보면 공기는 불 2개, 물은 공기2개와 불 1개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흙 하나만은 공정불변이지만, 나머지 세 원소는 상호가변적인 것이다. 물론 플라톤의 기하학적 우주론은 완전히 사색적인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플라톤이 우주를 기하학적으로 생각했다는 사실 자체이다.

PS) 이 당시 일화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의 정문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마시오"라고 써 있었다고 한다. 플라톤 이후에 그리스의 천문학은 피타고라스의 수와 플라톤의 기하학적 전통이 합쳐져서 이전의 관측천문학에서 수리천문학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들은 우주를 기술할 때 원운동과 등속도 운동으로 기술하려 하였다. 이 당시에 이미 해와 달, 오행성의 움직임을 거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들의 이론으로 그들의 움직임을 이 두 가지, 원운동과 등속도운동으로 표현하려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원운동과 등속도 운동이 가장 안정되고 단순하고 조화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천동설(지구중심설)은 다음의 이론으로 발전하였다. 에우독소스의 동심천구이론에는 각각의 행성들과 해와 달이 같은 중심을 갖고 있는 서로 다른 천구상에서 각기 다른 축을 가지고 회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에우독소스는 오행성은 각각 4개씩, 해와 달은 3개씩, 변치않는 천구( 별들이 붙어있는) 1개등 27개의 천구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의 문제점은
① 오행성의 크기와 밝기가 변한다는 것과,
② 춘-하-추-동의 간격이 다르다는 것,
③ 역행시 loop(고리) 모양과 개수가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55개의 천구를 만들었다.

아폴로니오스의 주전원-이심원 모델

주전원은 주된 원 둘레를 작은 원을 그리며 도는 것을 뜻한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데 달이 지구를 돌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될 것이다. 이심원은 회전의 중심과 지구(이때는 천동설임으로)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이는 타원운동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통해 위의 동심천구이론의 문제점을 해결하려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B. C. 384 - 322)는 경험절 관찰을 중시하였다. 그의 우주체계는 달 아래의 세계와 달 위의 세계로 구분된다. 달 아래의 세계는 4원소(물, 불, 공기, 흙)로 되어있고 변화하는 세계이다. 이에 비해 달 위의 세계는 불변의 세계로 제 5원소인 에테르(aither)로 차 있다. 그는 수정천구이론을 주장했는데 이는 위에서도 말했지만 공간상을 행성들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수정으로 된 각각의 천구에 박혀서 수정천구 자체가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고 바깥쪽에는 별들이 박혀있는 천구가 있다. 이는 우주가 유한함을 말해준다. 그리고 혜성은 달 아래의 세계에서 일어남을 나타낸다. 이는 이후 2000년 동안 서구를 지배하게 되었다. 후에 과학혁명기에서 자세하게 이것이 어떻게 깨지게 되었나를 설명하겠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태양중심설은 한가지 큰 결함이 있었다. 별의 밝기가 때에 따라 달라졌는데, 이것은 달 위의 세계가 변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과 모순이 되는 현상이었다. 이는 지구가 태양을 돌면서 별까지의 거리가 변하면서 생기는 것으로 이 정도를 관측할 정도니 그 당시 관측실력은 거의 경지에 있었나보다. 그래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태양중심설이 나왔다. 헤라클레이데스와 아리스타코스는 달, 지구, 5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도는 우주체계를 제안했다. 지구의 자전도 동시에 고려되었다. 그리고 태양이 지구보다 코고 달보다 태양이 멀다는 것도 제안하였다. 이것은 지구와 별들 사이의 거리가 달라지므로 밝기의 변화를 설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구가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다른 별들과 구별된다는 철학에 위반되고 연주시차를 관측하지 못하면서 (별들이 그렇게 먼지 몰랐으므로) 완전히 무시되었다. 이것은 19세기 연주시차가 허셀에 의해 관측될 때까지 태양중심설을 괴롭혔다.

(4) 헬레니즘

이시기를 대표하는 학자는 히파르코스(Hipparchos)와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로 대표된다.
히파르코스는 태양부근 별들의 연주시차를 보다 정확히 측정하기 위하여 쏳아올린 히파르코스 위성에 이름을 붙인 그 사람이다. 히파르코스는 태양의 운행표를 만들었다. 이것은 춘하추동의 길이가 다름을 보여 주었다. 그는 이것은 태양의 공전이 원궤도의 중심이 아닌 이심점을 돌기 때문이라 했다. 그리고 성표(성도)를 만들어 1080개의 별의 위치와 밝기를 표현했다. 또한 그는 지구의 세차(지구의 자전축이 움직이는 것, 팽이의 운동처럼) (히파르코스는 춘분점과 추분점이 서쪽으로 조금씩 움직이는 것으로 발견하였다.)를 발견하여 1년에 48초임을 알아내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히파르코스의 관측자료를 정리하엿고 그때까지의 수많은 서적들을 정리하여 발간한 [알마게스트(Almagest)]로 유명하다. 이는 아랍말로 '가장 위대한 책'이라는 뜻이다.그는 이미 나와 있던 이심, 소원, 대원의 이론을 더욱 발전시켜서 새로 대심의 이론을 만들었다. 이심은 행성궤도의 중심이 지구에서 약간 떨어져 있다는 것으로 행성과 지구 사이의 거리의 변화를 보여 줌으로써 행성의 밝기가 달라짐을 설명했다. 행성들은 대원을 그리면서 동시에 다른 방향의 축으로 소원을 그린다고 함으로써 후퇴운동 같은 행성의 복잡한 겉보기운동을 설명했다. 이로써 원운동과 정지해 있는 지구는 변함이 없었으나 동심천구의 개념은 깨졌다. 결국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은 관측현상을 더욱 정확하게 설명하는데 성공했으나, 행성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medthrdnjsdns동을 한다는 원칙을 깨뜨리는 대가를 치렀다. 그래서 수정된이란 수식어를 붙이게 되었다.

그의 체계는 크게 환영을 받았다. 이유는 당시의 관측을 정확히 기술하고 복잡한 계산으로 천체의 위치를 잘 예측할 수 있었고 연주시차를 보이지 않았으며 그리스 시대의 철학과도 일치하고 당시 상식과도 일치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의 수정된 지구중심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과 결합되어 공인된 우주체계로써 코페르니쿠스가 나올때까지 서양천문학을 지배하였다.

(5) 중 세

흔히들 중세를 암흑기라 표현하는데 천문학도 마찬가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체계를 근본적으로 극복하지 못했다. 허나 전혀 진전이 없던 것은 아니다. 천계는 에테르고 지계는 4원소로 되어 있으며 유한한 우주론과 진공을 부정했다. 그러나 이후에 진공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고 등가속도운동이 제기되고 복수우주론이 나타났다. 여기서 복수우주론은 우주가 여러 개라는 이론으로 이것이 제기된 이유는 설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우주를 하나밖에 못만들었겠냐?는 신학적인 이유에서 나온 것이다. 중세인은 신학의 지배를 받으면서 우주를 기하학과 수학으로 조화롭게 설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현상에 대한 구제에만 머물고 물리적 실체를 다루지 못한 점이 17세기 과학혁명기의 근대과학자와의 차이점이다.

(6) 과학 혁명

흔히들 과학혁명은 천문학 혁명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다. 그리고 그 시발점을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이 나온 것으로 본다.

①코페르니쿠스(1473-1543)

1400년 동안 잘 내려온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 우주체계는 두 가지 이유로 문제가 되었다.
첫째는 그것을 토대로 만든 역의 1년의 길이가 일정치 않아 크게 불편한 것이고, 둘째는 지구중심설이 많은 결함을 지니고 있어 당시의 천문학자들이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제멋대로 고쳐 우주체계가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진 것에 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탈리아에서 유학할 때 마침 붐이 일어난 신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우주가 단순하며 수학적 조화를이루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철저한 플라톤주의자인 그의 눈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는 너무나 복잡한 괴물이었다. "도대체 신이 만든 우주가 이렇게 복잡할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피타고라스-플라톤 전통을 이어받아 자연현상은 수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기계철학의 영향으로 자연현상은 반드시 인과관계를 갖는다고 생각하여, 자연은 물질과 물질의 운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기존의 과학체계를 유지하고(원운동과 등속도 운동) 지구와 태양의 위치만을 바꿔 태양중심설을 제기하였다. 그는 천체역학적 지식이 전무했으므로, 토마스 쿤은 그를 최후의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자인 동시에 최초의 근대 천문학자라고 했다.

②티코 브라헤(1546-1601)

그는 덴마크의 귀족의 아들로 왕의 도움을 받아 흐벤섬에 "하늘의 도시"라는 관측소를 세우고 평생을 관측에만 몰두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관측의 천재였다. 그가 망원경도 없이 얻은 관측값은 오늘날의 값과 거의 일치한다. 케플러는 그를 '천문학의 불사조'라 했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의 수학적인 간결성에 호감을 가졌으나, 그것은 물리학적으로 불합리하고 성서와 맞지 않는다고 해서 거부했다.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도 거부하여 그만의 또다른 체계를 만들었다. 그의 체계는 행성들은 태양의 주위를 돌고, 다시 태양은 행성들을 거느리고 지구의 주위를 돈다. 이는 위 둘을 절충한 것이다. 그는 우연히 카시오페이아자리에서 한 별이 색깔이 흰색에서 노란색, 그리고 붉은 색으로 변하는 것을 관측했다. 그가 신성(NOVA)이라 이름붙인 이별은 달 위의 세계는 변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이 틀렸음을 말해 주었다. 티코는 1577년 유럽 상공에 나타난 혜성을 관측하였는데 그의 관측에 의하면 이 혜성은 화성의 궤도를 지나게 되었다. 이는 수정으로 된 딱딱한 천구를 뚫고 지났음을 의미하므로 수정천구의 개념을 깨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혜성은 달아래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도 깨졌다.

③케플러(1571-1630)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보수적 요소를 거부하고 근본적으로 태양중심체계를 바꾸어 놓았다. 그는 학생시절 열렬한 코페르니쿠스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의 궤도 중심은 태양에서 약간 떨어지게 하였는데 이는 지구를 갑자기 1개의 행성으로 떨어뜨리기가 안되어 다소 특전을 부여했던 것 같다. 허나 케플러는 이것을 참을수가 없어 궤도의 중심을 태양과 일치시켰다. 그는 티코와 마찬가지로 루터파 신교도였다. 그는 태양숭배자였고 음악을 아주 좋아했다. 그는 생애에 세권의 책을 발표하였다. 그 처음이 1596년에 발표한 [우주의 신비]라는 책이다. 이 책은 왜 행성은 6개(수, 금, 지, 화, 목, 토)인가 하는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던졌다. 왜 신이 5개도 아니요 7개도 아닌 6개의 행성을 만든데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5개의 정다면체 사이에 6개의 천구를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8, 20, 12, 4, 6면체가 수, 금, 지, 화, 목, 토성 사이에 있어서 지구는 20면체에 외접하고 12면체에 내접하는 공에 붙어 있다는 것이었다. 1600년 케플러는 티코의 조수가 되었다. 티코는 생전에 수학적 계산을 싫어했다. 케플러는 수학은 천재이나 관측은 무지했으므로 둘은 환상의 콤비를 이룬 것이다. 허나 둘은 성격이 맞지 않아 만나자마자 싸우기 시작했다.

결국 파국 직전에 티코가 갑자기 죽게되어 티코의 수많은 관측자료는 케플러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케플러는 티코의 관측자료를 분석하면서 행성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임을 알게 되고 행성들의 공전속도가 변하는 면적속도 일정의 법칙을 알아내었다. 허나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역시 고대 그리스적 고정관념이 있는 자였기에 원운동과 등속도운동이라는 전제를 깨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것보다 티코의 관측능력을 더욱 확신했다. 그는 케플러 제3법칙인 공전주기의 제곱은 공전 궤도의 장반경의 세제곱에 비례함을 알아내고 이 신이 만든 우주가 원운동과 등속도운동이라는 조화로움을 갖고 있지 않음을 개탄하며 제3법칙의 이름을 "조화의 법칙"이라 지었다. 1609년 그는 [새로운 천문학]이라는 저서에 케플러 제1,2,3법칙을 소개하였다. 조화로운 우주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한 그는 1619년 [우주의 조화]라는 제목으로 토성은 베이스, 스성은 소프라노, 화성은 도, 솔, 지구는 미, 파소리를 낸다고 했다. 그리고 지휘는 바로 신이다. 수정천구가 티코에 의해 깨지고 나니 행성을 궤도에 붙잡아두는 힘이 필요해 졌다. 이미 예전에 원심력의 개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케플러는 이 문제에 대해 답을 하였다. 우선 태양에서 나오는 신비의 힘 아니마 모트릭식(anima motrix)가 행성들을 접선방향으로 밀어낸다 하였고, 태양과 지구등 행성들은 거대한 자석으로 보아서 자기력이 인력으로 작용한다고 하였다. 물론 뉴튼의 중력하고는 다른 것이다. 즉 아니마 모트릭스와 그에 반대되는 자기력이 균형을 이뤄 행성의 궤도를 유지한다고 설명하였다.

④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

갈릴레이는 네덜란드에서 망원경이 개발된다는 소식을 접하자 스스로 렌즈 두 개를 가지고 30배율짜리 망원경을 제작했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은 그것을 가지고 하늘을 관측한데 있다. 그는 망원경으로 목성의 4대위성(이오, 에우로파, 가니메데, 칼리스토)을 발견하고(이는 모든 것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지구중심설에 결정적인 헛점이 됨), 태양의 흑전과 달의 바다. 금성의 위상변화(태양중심설의 증거)를 관측하였다. 갈릴레이는 근대 역학의 창시자이다. 피사에 있던 시절 갈릴레이가 쓴 [운동에 관하여]는 아리스토텔레스 운동이론을 반박한 것이다. 피사의 사탑에서 실험한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체가 떨어지는 속도가 같다는 실험은 유명하다. 허나 이것의 사실여부는 아무도 모른다.

⑤ 데카르트 (1696-1650)

데카르트는 철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천문학에서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그는 기계철학을 확립하여 자연계는 기계처럼 움직이며 그 원리등은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관성의 법칙을 얘기 했는데 이는 직선운동을 뜻하고 천계와 지계의 구분이 없으며 무한 우주의 가능성을 비쳐보였다. 그는 왜 천체는 원운동을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소용돌이 이론(vortex theory)를 보였다. 이 이론은 세상을 구성하는 3요소로 첫째, 무겁고 딱딱한 것 : 고체등 : 별, 둘째, 빛을 내는 것, 셋째, 투명한 얇은 것으로 에테르를 말했으며 에테르의 소용돌이 운동이 천체의 원운동을 만든다고 하였다.

⑥ 뉴튼 (1642-1727)

뉴튼은 철저한 기계철학자 였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세우고 근대 역학 체계를 완성했다. 케플러의 세가지 법칙은 뉴튼에 의해 수학적이고 물리적으로 증명되게 되었다. 그는 1687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RINCIPIA]란 저서를 발표하여 모든 것을 집대성하였다. 그 책의 1부는 개념설명이 나오고 2부에는 뉴튼의 운동3법칙인 관성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이 나오며 3부에는 천체의 운동에 대해 나온다. 뉴튼은 프린키피아의 서문에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이 책을 철학의 수학적 원리들로서 제시한다. 왜냐하면, 철학의 임무 전체가 이것-운동의 현상들로부터 자연의 힘들을 탐구하고, 그 힘들로부터 다시 현상들을 보여주는-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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