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관련

카오스와 동양사상

염결 2006. 8. 9. 14:26
카오스와 동양사상


카오스와 신화


과학 수준이 낮았던 시절에도 이미 인류의 조상들은 카오스의 생명력을 직관으로 파악하고 신화의 형식으로 꾸며 놓았다. 세계의 여러 고대 신화에는 태초에 카오스(혼돈)가 서서히 조직화되었다는 사상이 있다. 가령 고대 이집트, 북미대륙의 토착민, 이스라엘, 중국, 일본의 천지창조 신화의 시작은 한결같이 혼돈(카오스)이다. 이들 카오스는 어둠이 깔려 있는 바다, 또는 아무 것도 없고 오직 허공과 바다만 있는 카오스이다. 그것이 두 개로 갈라져서 한 쪽은 하늘, 다른 쪽은 땅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카오스(혼돈)에서 코스모스(조화 질서)가 형성되었다는데 그것은 고대 문명이 절정에 달할 무렵 그간 거친 자연과 맞서 이룩한 문명에 대한 긍지의 표시이기도 하다. 코스모스로의 바램은 자연 철학을 기반에 둔 과학을 낳았다.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는 "모든 것은 물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보이고 현상은 다양하지만 그 기본은 결국 물로 귀착시킬 수 있으며, 천지만물을 만들어내는 기본, 곧 "알게(arch)"는 물임을 주장했다.

한편 탈레스의 제자들 가운데는 스승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철학자도 나타났다. 아낙스만도러스(Anaximandros, B.C 611-546)는 이 세계의 알게를 "무한(제한 할 수 없는 많은 것들)" 또 그 제자인 아낙스매내스(Anaximenes, BC585-528)는 "공기"라 하였다. 이와 같이 탈레스 이후의 자연철학자들은 알게를 서로 다르게 여기고 물, 공기, 무한 또는 불, 흙 등으로 내세우면서도 나름의 확고한 설명체계를 내세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탈레스를 철학의 아버지로 삼은 것은 '알게를 찾고, 그것으로부터 체계적으로 세계를 설명하는 방법'을 처음으로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요소 환원주의적 사고의 시작이다.


노자와 혼돈


노자의 세계관은 혼돈을 만물의 원천으로 삼고 있다.

"이름도 모양도 없는 것이 천하의 시작이며 이름과 모양이 있는 것이 만물의 어머니다."(一장). 여기서 "이름도 모양도 없는 것"은 곧 혼돈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노자의 혼돈은 道로 간주되기도 한다.

"有物混成", 즉, 혼돈이 천지창조 이전부터 존재해 있었다. 그 道는 고요하여 아무런 소리도 형태도 없고 다른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존재로서 영원불변이다.

"....도대체 道라는 것은 어렴풋하며 뚜렷하지 않고(혼돈), 어렴풋한 가운데 어떤 현상이 있다. 어렴풋하고 뚜렷하지 않은 가운데 무언가 있는 것이다. 깊고 미묘한 가운데 영묘한 정기가 있는데 그 정기는 더할 나위 없이 진실하여 ......" (二十一장)

노자는 무위자연의 인생, 그리고 무위자연의 정치를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주요관심은 현실을 초월한 영원의 세계에 있었다. 이들 고유명사가 없는 명제에서 그를 중국최초의 철학자로 지목할 수 있다.

노자의 자연철학에 있어서의 근원(알게)은 "도"이며, 또한 도의 본질은 無이다. "천하의 만물은 有에서 나오고, 有는 無에서 나온다." 그 후 노자의 "무(無) 철학"은 불교의 空에 결합되기도 했다.

희랍의 자연철학이 현실적인 물을 '알게'로 삼은 것과는 달리 동양에서는 노자의 무와 불교의 공이 필적한다. 동서양 문명의 성격 차이는 이미 고대 철학에서 비롯되고 있다. 즉 서양 철학 有에, 동양의 無(空)철학이 대응한다. 노자는 도의 본체인 무에서 차례로 만물이 태어나는 과정을 설명하는데 최초의 有는 一이며, 無는 0이다. 불교적인 수의 시작 또한 공에 해당하는 0이며, 또한 불교와도 같이 인도 사상의 풍토에서 태어났다.


과학의 돌파구


오늘날 과학은 사람을 우주 공간으로 보내고, 생물복제도 가능한 단계에 도달했다.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와 같이 항상 변하는 여자의 마음'이라는 가사가 있다.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나 여자의 마음은 카오스적인 것이다. 한치 깊이에 있는 사람의 마음이나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의 행방은 제대로 알 수 없다. 이 사실은 인간과 과학 사이의 갈등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기존의 과학 체계에 한계가 내재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곧 카오스적 현상에 본체가 있다는 '알게'의 믿음이 적절치 못한 것이다. 한편 불교는 我(기본적인 존재)를 처음부터 부정한다(諸法無我). 현상은 여러 개의 요인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야기된다는 불교적인 相依相關(서로 의존, 관련되어 있다)인 것이다. 과학자는 복잡계를 카오스의 창을 통해서 보았다고 한다. 카오스(넓게는 복잡계) 이론의 등장으로 탈레스의 알게, 즉 기본적 요소가 있다(환원주의), 또는 하나의 원인에 대해서는 반드시 하나의 결과가 나온다는 인과률이나 결정론의 유효범위는 제한적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제 과학자는 그 한계를 의식하면서 그 돌파구를 여러 개의 요인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나타나는 복잡계에서 찾게 되었다.

복잡계는 여러 개의 요소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야기하는 현상이며, 불교적인 相依相關과 같은 입장에서 출발한다.


카오스


기계론적 결정론이 확률론적으로 변하는 현상


'카오스'라는 생소한 말에서 무엇인가 엉뚱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 주변 곳곳에는 카오스가 도사리고 있다. 일기 변화로 인한 회오리바람, 홍수로 일어나는 탁류 속의 소용돌이나, 갑자기 몸에 발생하는 신경성 복통, 두통 등도 그 예이다. 이들은 모두 한 가지의 원인으로 귀착시켜서 설명할 수 없으며 여러 개의 요인들이 얽히고 곪히며 나타나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매일 접하는 일기예보는 간단히 온도, 기압, 풍속 등 3개의 요인으로 설명되는데 실제는 이들보다 훨씬 많은 요인이 얽혀 있다. 일기변화는 적어도 3개 이상의 요인으로 결정되는 카오스이기에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장기예보는 불가능하며, 항상 '비올 확률은 몇 %'라는 식으로 근사적으로만 설명되는 것이 고작이다.

수학에서 말하는 카오스란 상식적으로 말하는 단순한 혼돈이 아니다. 처음에는 정연한 질서를 유지하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을 나타내기도 한다. 맑은 하늘이 갑자기 새까매지면서 벼락이 치는 것도 그 보기이다(청천벼락). 좀더 형식적으로 말하면 결정론적으로 진행하던 것이 갑자기 불확정적인 양상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대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가 실감되는 순간이다.

카오스의 용어와 불교적 개념에는 놀라울 만큼의 많은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과학과 종교로서 판이한 목적을 지니면서도 현상은 여러 요인이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나타난다는 연기사상을 공유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처음에는 결정론적으로 변화하던 것이 어느 순간 확률론적인 현상으로 변하는 것이 카오스이며,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초기치(初期値)에 관한 민감한 반응 : 처음의 출발점, 자리와 시간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불교적으로는 初發心).

(2) 되먹임(feedback, 불교적으로는 업) : 지금 순간의 행위가 다음 순간의 상황을 결정한다.

(3) 나비효과 : 행로에 예기치 않은 사소한 일로 미래가 크게 변한다.

(4) 프랙탈(자기닮음, 불교적으로는 一卽多, 多卽一)

(5) 자기조직(생명력, 불교적으로는 空에서 有, 色卽是空, 노자의 자연사상)


카오스와 여실지견(如實知見)


카오스적인 현상에 피타고라스적인 증명은 의미가 없다. 증명이란 유클리드기하학에서 본 바와 같이 애초에 절대 진리로 삼는 '공리'에서 출발하고 엄격한 논리를 거치는 것이다. 요컨대 '절대 진리(공리)가 존재한다'는 믿음에서 증명이 시작된 것이다. 수학의 공리는 자연현상이나 물질에 알게의 존재를 믿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므로 현상이 '연기'로 복잡하게 전개되어 간다는 불교적 세계관, 또는 여러 개의 요인이 얽혀서 야기되는 카오스적인 현상은 증명 형식으로는 그 실상에 접근조차 할 수 없다. 석가모니가 갈파한 바와 같이 '여실지견(如實知見)', 연기적 관찰로 요인 사이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요소환원주의, 기계론적인 단순계에서는 현상을 세부적으로 분석함으로써 하나의 원인으로 귀착시킨다.

그러나 여러 요인으로 얽힌 복잡계는 그런 방법으로는 접근하지 못한다. "나무는 보아도 산은 보지 못하는 과오"를 범하지 말라는 금언은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카오스 이론은 종전의 수학의 주류인 공리와 증명 형식을 외면하면서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그 변화 패턴을 추적해 간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고속으로 현상을 추적할 수 있는 컴퓨터의 등장으로 실마리가 잡히기 시작했다. 카오스, 또는 복잡계 이론은 컴퓨터로 뒷받침되는 정보화 시대의 과학이다. 여기에는 공리적 명제나 형식적인 논리체계는 없으며, 오직 현실을 충실히 관찰할 뿐이다.

인생, 사회, 자연 등의 복잡한 대상은 데카르트적인 분석과 종합의 방법으로 본연의 모습은 볼 수 없다. 가령 대뇌생리학에서 뇌는 아무리 세부를 해부해도 죽은 뇌를 파헤치는 결과가 되는 것이므로 살아있는 본연의 뇌의 모습은 볼 수 없다. 실제로 살아 있는 뇌를 해부하면 죽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뇌에는 여러 세포와 신경회로가 얽혀 있다. 지금까지는 뇌를 좌뇌, 우뇌, 전두엽 이라는 식으로 분할시켜 각 분야마다 맡은 기능이 따로 있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사실은 이들이 서로 얽혀 뇌로써의 기능을 발휘하는 것임이 밝혀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의 분야가 있다. '인지과학'이란, 심리학을 중심으로 철학, 정보과학, 대뇌생리학, 컴퓨터과학 등의 연구자가 개척한 학제간(interdisciplinary) 학문으로, 인간의 인지능력을 연구하는 새로운 과학분야인데 이 학제적 성격이 어느 특정 분야만을 파헤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뇌를 중심으로 하는 복잡계의 특성이다.


삼체운동과 초기조건


갈릴레오는 물체의 낙하운동이 물체의 무게와는 관계없음을 확인했다. 그는 처음 물체가 사면을 미끄러져 내리는 데서 관찰을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실험으로 처음 물체의 위치와 속도가 조금만 달라질 때는 그 후의 운동에도 별 관계가 없음을 알았다.

케플러는 행성에 관한 삼대법칙을 발견했다. 그 내용은 화성, 목성 등의 행성 운동에 관한 법칙을 말한 것으로 그 후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관한 중요한 사실은 행성운동에 다소의 오차는 시간이 경과해도 큰 영향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슬롯머신"은 사소한 오차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처음의 발사방향과 강도가 나중과 완전히 일치하면 알은 같은 운동을 하겠지만 사소한 차이로 엉뚱한 변화가 나타난다. 포앙카레는 이러한 운동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눈을 스쳐가는 매우 작은 원인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큰 효과를 나타낼 때가 있는데 이것은 우연이 나타나는 것이라고만 말하고 있다."({과학과 방법})

이러한 운동이 바로 "카오스"를 야기한다. 이 운동은 필요한 정보 모두를 갖는다 해도 사소한 오차 때문에 엄청난 결과가 나오는 것이므로 예측불능이다.

지구와 태양과 같이 두 개의 행성만을 대상으로 했을 때는 간단히



그림 1. 초기치에 관한 민감한 반응. 로렌츠(Lorenz)는 처음에는 거의 같은 값에서 출발한 일기모델이 초기치의 근소한 차이로 전혀 달라지는 모습이 됨을 보였다.

계산할 수 있었던 것도 3개가 되면 문제는 비약적으로 어려워진다. 그것이 三體문제이며, 포앙카레는 "삼체운동의 복잡성은 놀라울 뿐이며 나는 도저히 이 모양을 그리려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고 실토하고 있다. 삼체문제의 복잡성은 초기조건과 되먹임, 그리고 나비효과 등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 논문이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60년대 이후 컴퓨터가 등장하여 너무 복잡해서 도저히 그리려고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궤도를 쉽게 추적할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였다.


나비효과


나비효과란 '오늘 서울의 거리를 날아다녔던 나비의 작은 날개 짓이 내일 뉴욕에 폭풍우를 야기할 수도 있다'라는 말로 설명된다.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플로리다(Florida)주의 몇표가 승부를 결정했다. 또한 그 날의 날씨만 좋았다고 해도 선거결과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림 2. Lorenz attracter.

증권시장에서는 사소한 말 한마디로 경제계의 판도가 뒤바뀌는 '나비 효과'가 나타난다. 특히 요즘 정보화 사회에 돌입하면서 인터넷에 오른 문장 한 줄이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일을 보게 되었다. 이름 있는 명사를 죽이는 데는 칼이 필요 없으며 인터넷 상에 오른 나비의 날개와도 같은 글 한 줄이면 충분하다. 일기는 풍속, 기압, 온도 등의 요소가 야기하는 현상이며, 삼체운동의 보기이다.

로렌츠는 이들 3개 요소로 일기모델을 만들어 컴퓨터에서 그 추이를 조사 중 나비효과가 나타남을 발견했다.


반복방정식의 보기


y=rx(1-x)는 간단한 2차방정식이며 중학생도 간단한 포물선으로 그 궤적을 그릴 수 있다. 그러나 x를 시계열상의 한 점으로 잡고, 반복적으로 대입(feedback, 되먹임)하면 엉뚱한 결과가 나온다. 컴퓨터의 등장으로 수많은 되먹임 대입계산이 가능해짐으로써 발견된 사실이다. 반복방정식을 이용하여 카오스를 연구하는 수학자는 우연이라고도 할 수 있고 필연이라고도 할 수 있는 기묘한 사실을 증명해 낼 수가 있었다.

가령, xn+1=rxn(1-xn)라는 식에서 xn의 값을 우변에 대입하면 좌변의 xn+1이 정해진다. n을 시간으로 할 때, 위의 식 xn+1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해진다. 지금 초기조건 x0의 값을 0과 1 사이의 수로 잡으면 x0에서 x1라는 식으로 차례로 그 다음의 수가 결정된다. 이 관계는 xn에서 xn+1이 유일적으로 정해지는 것이므로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결정론의 세계이다.

그런데 r의 값에 작은 변화를 주면서 일정한 값을 넘었을 때의 변화과정을 추적하면 전혀 다른 수열이 나타나는데, r에 관한 작은 차이가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는 나비효과, 즉 카오스적 현상이다.

한편 위의 수열 x0, x1, …, xn, …에서 0과 0.5 사이에 있는 것을 A, 또 0.5와 1의 사이에 있는 것을 B라고 하면 A와 B, 두 문자로 이어지는 문자열이 된다. 여기까지는 결정론의 세계이다.




그림 3. 반복방정식의 분기와 카오스의 영역. r의 값이 3.57 전후에서는 갑자기 카오스의 영역에 들어간다. 여기서는 Xn의 값이 어디로 가는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또한 A와 B의 문자열을 이용해서 우연성의 세계를 도입할 수 있다. 중학교 수학 교과서에 나오는 확률의 보기를 생각한다. 지금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A로 하고, 뒷면이 나오면 B로 한다. 이런 식으로 동전을 계속 던지면 A와 두 개로 된 문자의 열이 생기는데 이것은 분명히 우연, 곧 확률의 세계이다. 이것 자체로서는 반복방정식(차분방정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나 앞서의 xn+1=rxn(1-xn)에서 적당한 초기 조건 x0을 잡고 얻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xn의 경로를 앞서 정한 조건 0∼0.5를 A, 그 외를 B로 바꾸어 넣으면 이 우연성의 결과로 만들어진 A, B의 문자열과 완전히 일치되는 것이므로 필연의 결과가 된다.

이와 같이 단순한 식 하나로 필연도, 우연도 될 수 있는 것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동전을 던지기 전에 미리 x0을 취해두고 동전을 던졌을 때의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아니다. 먼저 동전을 던지고 그 결과를 위 반복방정식으로 재현했을 뿐이다. 이 사실은 곧 '우연적인 것이지만 되돌아보면 필연적인 경로를 밟은 것으로 이해된다'는 격이다.


Fractal


코흐곡선과 프랙탈


인식은 비교와 유별(類別)에서 시작되며, '一(부분)과 多(전체)'의 관계를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현실에 적응해 나갈 수 있다. 이 사실을 새겨 말한다면 모든 생물은 주변(상황)에서 자기닮음(一卽多, 多卽一)을 파악할 수 있기에 생존이 가능하다. 그것이 곧 먹이를 찾고 자기와 같은 류를 가려내는 능력이다. 쌀알을 자세히 관찰하면 모두가 약간씩은 다르며,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없다. 이 세상에 나와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을 다 같은 쌀알로 여긴다. 같은 류에 관한 자기닮음을 직관적으로 인식하기에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쌀알 하나마다 지닌 고유의 모양을 무시해서 쌀 전체의 공통된 부분으로 '쌀'을 인식하는 것이다. 자연은 자기닮음으로 꽉 차 있고, 생명체에는 그 본질을 식별하는 능력이 내재되어 있다. 이 세상 모든 현상은 자기닮음의 구조(一卽多, 多卽一)를 지니며 끊임없이 변화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은 …과 같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같다'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가령 쌍둥이처럼 같다, 부자간처럼 같다 등 '같다'는 말에도 여러 가지 경우가 있다. 완전히 합쳐지는 것, 크기는 다르지만 닮았다는 것… 등. 위에서 설명한 "같다"를 좀더 형식적으로 설명해 보자. 수학에서는

"① A는 A와 같고, ② A와 B가 같으면 B와 A와 같다, ③ A와 B가 같으므로 B와 C가 같으면 A와 C가 같다."

이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할 때 '같다'고 한다(同値律). 특히 유클리드(상식)의 세계에서는 완전히 겹칠 때만 "같다"가 성립되고 부분은 전체보다 작은 것이므로 같을 수가 없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부분이 전체와 같고 전체가 부분과 같다는 사고가 있다.

"一卽多, 多卽一"이 그것이며 '卽'이 "같음"을 의미한다. 즉 '부분은 전체와 같고, 전체는 부분과 같다.'를 의미한다. "一卽多, 多卽一"의 卽은 곧 수학적 같음의 조건을 만족시킨다.

이 사실을 실감시켜 주는 코흐곡선으로 진리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코흐곡선은 분명히 1차원의 직선을 단순히 한없이 이쪽 저쪽으로 꺽어서 만든 것이다. 그림과 같이 코흐곡선(K)을



그림 4. 코흐곡선.

3배 확대한 것(K')을 만들자. 아무리 짧은 선분에도 무한이 점이 존재하는 것이므로 고흐곡선의 길이는 무한대이다. 이 그림은 아무리 축소해도 본래의 그림과 같은 一卽多, 多卽一의 구조이며, 카오스이론에서는 자기닮음, 또는 프랙탈(fractal)이라고 한다.

이에 관한 재미있는 예로 프랙탈 이론의 창시자 만델브로는 [영국섬의 해안선의 길이는 얼마인가]라는 논문에서 같은 영국 섬의 프랙탈적인 해안선의 길이가 자(尺)에 따라 달라짐을 실제로 증명했다.


인생과 프랙탈의 세계





그림 5. 고사리의 자기닮음.

교향곡은 단순한 템포가 차례로 변조되고 템포와 음색을 바꾸면서 연주되며, 음보의 길이를 늘이고 줄이고 하는 기법을 구사하고 올라가는 선율의 부분을 내리는 역행의 기법도 사용한다. 위대한 음악일수록 반복과 전개 속에 템포는 모습을 여러 각도로 유기체처럼 변형시킨다. 마치 프랙탈의 그림이 차례로 전개되는 모습이 시간의 흐름 속에 전개되어 가는 것을 실감시킨다. 각 음절의 한 토막만을 듣고도 우리는 그 전체 음의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다. 그것은 "부분을 확대할 때 전체를 얻을 수 있다"는 프랙탈의 개념과 같은 것이다.

특히 프랙탈적인 도형에 관해서는 절대적인 길이는 없으며, 자에 따라서 길이가 달라진다. 구름, 해안선, 산맥의 모양, 자연 뿐만 아니라 사회 변화, 인생의 행로 모두 복잡계이다.

이들 사실을 간추리면 一卽多, 多卽一(프랙탈, 자기닮음)일 때는 자에 따라 길이가 달라질 수 있다. 즉, "隨處作立處階眞({臨濟錄})"이 되고 절대 진리가 없는 것, "諸法無我(모든 진리는 절대적인 아니다.)"가 성립되는 것이다. 요컨대 "一卽多, 多卽一", 어느 하나도 전체와 같은 것이므로 隨處階眞(어디에나 진리가 있다), 諸法無我(절대 진리는 없다, 그렇기에 부처는 어디에도 있다.)이고 어느 것도 절대적일 수 없기에 이들 두 명제는 동치의 명제인 것이다.

수학(과학) 진리는 없다. → 수학(과학) 진리는 가설이다. → 진리는 상대적이다.

지금 나의 몸에는 수십조 개의 세포가 있는데, 그 중 일부는 죽고, 또 새로이 태어나면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낱낱이의 수많은 인간이 하나의 생명체로서의 전 인류를 유지하는 모습과도 같다. 생물학에서는 '개체의 발생이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명제가 있다. 아기가 모태에서 잉태된 후 자궁 내에서 성장하는 과정이 인류 전체의 진화과정을 그대로 밟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의 존재는 시간과 공간의 양면에서 부분(개인)이 전체(전 인류)와 같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의상대사(義湘, 625∼702)는 이 사실을 '一微塵中含十方 一念卽是無量劫(티클과 같은 곳에 온 우주가 들어가고, 한 순간에 영원이 수렴된다[法性偈])'고 했다. 인간을 두고 말하면 개인(一)은 전 인류(多)와 자기닮음의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비록 나의 생명은 짧고 보잘 것 없어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최초의 인간부터 현대 지구상의 전인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인간들이 축적해 온 삶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칼 프리브램(Karl Pribram)의 세계


프리브램은 뇌에 관하여 혁명적인 견해를 주장한다. 뇌는 사진의 건판과도 같이 기억의 대상을 그 일부분에만 대응시키지 않고 오히려 뇌 전체가 함께 기억하고 있다는 '뇌의 홀러그래피 모델'이다.

홀러그래피란 렌즈를 사용하지 않은 사진의 일종이다. 영국의 물리학자 데니스 가보르(Dennis Gabor, 1900. 6. 5∼1979. 2. 8)는 처음으로 홀러그래피 화상을 만든 공적으로 노벨물리학상(1971)을 받았다. 보통의 사진은 렌즈를 이용하여 대상이 2차원 평면에 1대 1로 대응되도록 하는데 홀러그래피는 피사체에서 발산되는 빛의 파동야(wave field)는 감광판상에 간섭 패턴으로써 기록하는 홀로그램이며, 레이저와 같은 광선 속에서 파동의 패턴이 재생되어 삼차원의 상이 나타난다. 렌즈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홀로그램은 확산된 빛이 서로 간섭하는 상태를 기록함으로써 홀로그램의 어느 부분도 전체의 상을 재현한다.


대우주와 양자의 대응


80년대 초 '미크로 결사대'라는 공상과학 영화가 큰 히트를 했다. 국방 문제와 관련되는 원자핵에 관한 중요한 지식을 지닌 물리학자의 뇌속 깊이 들어 있는 병을 치료하는데 그것은 통상적인 뇌수술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여러 명의 의사가 탄 소형 우주선을 극미의 크기로 축소하여 몸 속에 집어넣는다는 굉장한 구상이다. 무사히 혈관을 통해 뇌에 접근한 미크로우주선은 문제의 뇌세포 상공에 정지했다. 세포의 표면은 마치 넓은 바다처럼 보인다. 그 바다 위에 작은 부표(浮漂)와 같은 세포막이 수없이 둥둥 떠 있으며, 또 곳곳에 빙산과도 같은 것도 있다. 우주선은 그 바다 속을 뚫고 세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가는 곳마다 혈관, 신경망과 온갖 것들이 나타나는데 마치 우주선으로 광대한 우주를 헤매는 것과도 같은 모험의 연속이다. 그 이야기는 뇌세포 깊은 곳에 있는 병인을 찾아서 제거하는 데 성공하여 무사히 돌아와 다시 지구상의 보통 크기로 환원된다. 요컨대 극미의 뇌 세포 속도 제대로 확대하면 대우주와 같은 구조임을 시사하고 있는데 "하나의 먼지가 전우주와 같다"는 화엄경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우주선의 이름 엘빈(Erwin)은 저명한 물리학자 슈레덴거(Erwin Schrdinger, 1887∼1961)의 이름에서 얻은 것이다. 그는 원자 속에서 원자핵의 주변을 춤추며 돌아다니는 양자궤도에 관한 파동함수를 발견함으로써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그 구상은 원자 또는 세포가 대우조와 같은 구조임을 시사하고 있다. 거대한 프랙탈 구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카오스의 생명력



장자와 카오스


노자의 제자격인 장자 또한 혼돈의 생명력을 굳게 믿었다. 莊子의 應帝編에는 혼돈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일본인 노벨상 수상자 유가와(湯川秀樹)는 중간자 연구에 관한 착상을 다음 글에서 얻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남해의 제왕 숙(枙)과 북해의 제왕 홀(忽)이 중앙의 제왕 혼돈(混沌)의 땅을 찾아가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이들 두 제왕은 그 대접에 보답하기 위해 상의했다. '사람에게는 모두 7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을 쉬는데 혼돈에는 그것이 없으므로 구멍을 뚫어주자. 그리하여 이 두 사람은 매일 하나씩의 구멍을 뚫어 주었다. 그런데 7일째 마지막 구멍이 뚫어지자 혼돈은 죽고 말았다."

이 글은 혼돈에 손을 대는 일은 곧 죽음을 의미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가와는 원자핵 속의 중성자와 양자를 묶는 場을 만드는 입자를 생각하였는데, 그것이 곧 중간자로서 위 글의 혼돈에 해당한다.


노자의 무위자연과 프리고진


노자는 '道法自然(도는 자연에 따른다)'이라 한다. 이 자연은 산천초목과 같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된다', '있는대로 되어 간다'는 법칙과도 같은 개념이며, 人爲를 거부하는 無爲自然의 세계이다. 그렇기에 노자의 정치론은 자유방임일 수 밖에 없다. 또한 "천하의 物은 有에서 나오고 有는 無에서 나온다."고도 한다. 따라서 "道에서 一 → 二 → 三 → 萬物"이라는 것은 "無 → 有 → 萬物"과 같음을 의미한다. 無는 상식적인 '無'가 아닌 역동적인 생명력을 지니며, 곧 道라는 것이다. 또한 사물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형태를 갖게 될 때 無의 영역을 벗어나 有의 체계에 들어오게 되고, 만물은 陰을 업고 陽을 안으며, 沖氣로써 和를 이룬다. 沖氣는 곧 조화된 기를 의미한다.

노자에게 있어서 '三'은 만물을 생성하는데 충기와 음양의 二氣가 복잡하게 얽혀서 만물을 생성해 간다는 뜻이며, 신비적, 또는 형이상학적인 설명이다. 한편 노벨 화학상 수상자 프리고진(Ilya Prigogine)은 스스로 되는 "자연"을 과학적인 자기조직화 과정으로 설명하였다.

노자의 "三生萬物"이라는 구절을 과대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2500년 전 한 천재의 직관에 경의를 표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3개의 요인이 상호영향을 주고받을 때 혼돈의 생명력이 발생한다는 철학적인 내용이며, 과학은 아니며, 프리고진과 같은 차원에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애초노자의 '無'에는 천지만물을 생성하는 만물의 근원이며, 모든 것이 태어난다는 무한의 가능성과 포용력을 갖는다.

자연이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라면 "스스로 질서를 형성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엔트로피의 증대, 요컨대 무질서한 상태, 즉 난잡(란담)해진 것이라면 老子가 말한 자연, 스스로 되는 일, 또는 복잡계의 과학에서 말하는 자기조직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최근의 과학은 엔트로피 증대법칙은 닫혀져 있는 상태에서만 성립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닫혀져 있는 系(閉鎖系)는 외부와 에너지, 또는 물질의 출입이 없다. 그러나 에너지 또는 물질의 출입이 있는 열린 계에서는 스스로 질서가 형성된다. 나무가 자라고 어린이가 성인이 되는 것은 태양에너지, 대지로부터의 물, 또는 인간에게는 음식을 먹고 배설물을 방출하기 때문이다. 나무와 인간은 열린 사회(開放系)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생명현상은 열린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수학적으로는 표시할 수 없는 대신 거뜬히 자기조직화를 한다. "모든 것은 변한다." 그러나 그 내용에는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른 것과 그것을 이겨내는 자기조직화의 두 종류가 있다. "자기조직화"는 틀림없이 21세기 학문의 키워드가 될 것이다. 그것은 무질서로 향하는 힘에 질서화 하는 힘이 이겨낸 것이다.

스스로 되어 가는 자기조직의 개념은 생명 현상을 설명한다. "생각하는 일"은 가장 인간다운 생명활동이다. 그것은 뇌 속에서 이루어진 신경활동의 자기조직화에 관한 훌륭한 보기이다. 동물이건 생물이건 대부분의 고등생물의 수많은 세포가 분열, 성장, 분화하면서 하나의 생명을 유지, 발전시키는데, 그 과정이 곧 자기조직화의 연속이다.


진화의 원형


프리고진은 근대 과학의 틀을 깨고 복잡계의 과학을 제창함으로써 생명의 기원에 관해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는 "생명은 비생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최초의 생명의 씨는 생명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며, 생명력이 없는 물질 사이의 절묘한 얽힘에 의해 태어났음을 주장한다. 무엇이 세계를 바꾸어 왔으며 단세포에서 차원 높은 인간으로까지 발전시켜 가는 것일까! 불교는 그 힘이 연기이며, 부처의 자비임을 주장한다. 프리고진은 과학자의 입장에서 그것을 '복잡계의 산일구조(카오스의 가장자리)에서 발생하는 자기조직화'로 표현한 것이다.

프리고진은 복잡계에 관한 [산일(散逸) 구조론]에서 새로움을 창조하는 것과 새질서(생성)의 발생(자기조직화)과정을 과학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통계역학, 비선형수학, 分岐이론, 확률과정론 등 최첨단의 과학지식을 총동원해서 현상을 설명했다. 새로운 질서가 발생하는 자리(場)가 산일구조(散逸構造, dissipative structure)이며, 그 형식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다.

'산일구조 : 에너지나 물질이 들어오고 나갈 수 있으며(계방계), 그 출입이 평형이 아닌(非平衡) 상태에 있는 것.' 요컨대 새 질서는 비평형상태에서 산일구조가 형성된다. 개체의 생명, 또는 종으로서의 진화는 이러한 산일구조에서 형성된다. 모든 것(萬物)은 수많은 요소가 복잡하게 상호작용해서 야기되는 생명력을 지닌 카오스(혼돈)이며, 낱낱이의 개적인 요소는 높은 차원, 혼돈상태에서 자기조직(self organization)을 한다. 우리는 비근한 일상생활에서도 자기조직의 현상을 흔히 목격한다. 고대의 마을과 국가는 외부로부터의 명령이나 통제없이 스스로 조직화된 것이다. 즉 정지, 또는 평형이 아닌 상태에서 적절한 요동이 야기되어, 미묘한 조건 아래서 자기조직화를 이룬 것이다.


우주, 생명, 인류(생명 패러다임)


불교와 카오스(복잡계)의 이론은 諸行無常(끊임없는 변화)의 철학에서 출발하고, 변화(무상)의 본질을 관찰하는데서 많은 공통점을 갖는다.

21세기 사상의 주류를 이루게 될 것으로 믿어지는 생명체 패러다임, 즉 <복잡계의 과학 + 불교 철학>은 단순한 무위자연이 아니다. 최근의 과학 지식에 의하면 우주, 생명, 인류는 연속적인 고리로 이어져 있고,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계속 단세포에서 인간으로 진화한 것처럼 모든 대상이 복잡성을 더해 가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차원 높은 질서가 가미됨으로써 형성되는 복잡화로의 진행 과정은 다음과 같다. 자칫하면 경직화, 또는 放散(흩어짐)될 수도 있는 좁은 영역에서 기적처럼 여러 가능성 속의 하나의 질서가 자기조직화가 된 것이다.



요동→카오스→카오스의 가장자리(산일구조)

→경직화

→자기조직(새질서)→복잡화

→흩어짐



생물적 질서는 자연 도태의 결과라기 보다는 자기 조직화에 의한 자생적 질서이다. 다윈 진화론은 자연 도태로 인간의 등장을 설명하는데, 사실인즉 자기 조직과 자연 도태가 어울려 연출한 것이다.

21세기는 요소환원주의, 기계론적 세계관에 기반을 둔 종전의 과학 패러다임을 깨고 생명패러다임의 틀 안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성장해 갈 것임을 예상한다. C. P. 스노우(Snow)는 불과 반세기 전에 인문사회학과 자연과학의 깊은 골을 경고했었다. 그러나 이제 모든 태어나고 변화하고 사멸하는 생명적 현상은 인문, 사회, 자연과학의 울타리를 깨고 하나의 지적영역을 생명패러다임의 틀 속에서 발전해 갈 것이다

김용운 박사는 미국 어번대 대학원과 캐나다 엘버타대 이학박사로서 미국 위스콘신주립대 조교수, 한양대학교 도서관장, 한국전통과학연구소장, 일본 동경대, 고베(神戶)대 객원교수, 일본 국제문화연구센터 객원교수, 수학사학회 회장, 한양대학교 수학과 교수 등을 역임하고 현재는 수학문화연구소 소장, 한양대학교 수학과 명예교수, 국제수리철학 편집위원, 제2건국운동 공동위원장, 어린이에게 꿈을 주는 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다. 전문분야는 한 일 문화비교, 한 일 기업문화, 한국의 미래, 정보화 사회, 과학정책, 수학교육, 원형사관, 제2건국운동, 복잡계(카오스)이고 저서로는 한국수학사, 카타스트로피이론입문, 토폴로지입문, 집합론과 수학, 동양의 과학과 사상, 한국인과 일본인, 일본인과 한국인의 의식구조, 원형사관, 한 일 민족의 원형, 인간학으로서의 수학, 재미있는 수학여행(전4권), 지성의 비극, 엄마 이런 문제는 어떻게 풀어요? 1, 2, 프랙탈과 카오스의 세계, 초학습법, 원형과 유혹, 무너지는 한국 추락하는 한국인, 한국수학사, 수학사대전, 수학서설, 지적세계로 떠나는 여행, 아이디어 깨우기, 문화로 배우는 이야기 일본어, 도형이야기, 도형에서 공간으로, 수학의 약점, 수학클리닉, 수학사의 이해, 제2건국론, 카오스의 날갯짓 外 다수가 있다. 한국출판문화상(한국수학사) (1978), 서울시 문화상(1988년), 대한수학회 공로상(1995년) 등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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